"미술은 시대정신의 거울, 자본시장의 열기도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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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시대정신의 거울, 자본시장의 열기도 보이죠"

구스타프 클림트가 금빛 색채로 표현한 인간의 욕망은 벤처 투자 광풍에 휩싸인 1999년 닷컴 버블 사태를 떠올리게 한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군부독재와 맞서 투쟁하던 1970~1980년대 대학생의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이처럼 개인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명화의 감상과 해석은 다양하게 나온다.

김옥찬 전 KB금융지주 사장(사진)은 최근 <명화와 함께 걷는 미술 산책>을 냈다. 유럽과 미국의 크고 작은 미술관 50여 곳을 돌며 얻은 경험과 은퇴 후 미술관 전문 해설가인 ‘도슨트’로 인생 2막을 살며 쌓은 지식을 담았다. 그는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화가 중에는 인간의 좌절과 각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이들이 많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좋은 그림을 감상하며 명상에 잠긴 행복한 순간의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전 사장은 은행원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인물이다. 연세대 법학과 졸업 후 1982년 국민은행에 입사해 33년간 ‘KB맨’으로 지냈다. 증권운용팀장, 재무본부장, 최고재무책임자(CFO) 등을 거쳤다. 퇴직 후 SGI서울보증 대표를 맡았다가 KB금융지주 사장으로 복귀했다. 홈앤쇼핑 사장 이력을 끝으로 2023년 6월 은퇴했다. 입출금과 송금 처리를 하러 매일 구름같이 은행 지점에 사람이 몰려들던 ‘그때 그 시절’부터, 모바일뱅킹 도입과 인터넷은행 출범까지 함께한 국내 금융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미술에 빠져든 것은 커리어가 잠시 중단됐던 2018년이다. 부인과 55일간 1만㎞ 넘게 유럽 자동차여행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크고 작은 미술관 50여 곳을 다니며 미술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에서도 한 달 살기를 하며 미술관을 샅샅이 돌았다.

명화의 탄생 배경과 메시지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여느 미술 교양서적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차별화 요소는 금융인이자 경영자로서의 경험을 미술 이해에 녹여냈다는 것이다. 국내 금융산업이 겪은 굵직한 사건들을 명화의 한 장면과 함께 설명했다. 1998년 외환위기부터 2013년 STX 부실, 2015년 인터넷은행 출범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건 때마다 금융권에서 관련 보직을 맡으며 겪은 내밀한 에피소드를 담았다. 그는 “시대정신과 현실 사회를 반영하는 미술 작품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 전 사장은 요즘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도슨트’로 일한다. 국내에서는 노년층의 도슨트 활동이 생소하지만,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도슨트 상당수가 나이 지긋한 은퇴자인 것을 알고 도전할 용기를 얻었다. 퇴직 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2주 도슨트 과정을 이수했고, 20권 넘는 미술 관련 서적을 독파하며 지식을 쌓았다. 그는 “컨템퍼러리 아트, 입체파, 야수주의 같은 낯선 용어에 친숙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도슨트 1시간을 진행하기 위해 10시간을 예습하는 노력파다.

김 전 사장은 예술이 은퇴자의 삶에 풍요와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배우자와 함께할 수 있으면서 적은 비용으로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퇴직 후 삶에 큰 선물을 주고 있다”고 했다.

박종필/사진=문경덕 기자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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