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맞설 'AI 허브' 노리는 사우디, 빈 살만 펀드, 韓 스타트업 '쇼핑'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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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허라미 기자

그래픽=허라미 기자

#.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출범시킨 인공지능(AI) 전문 기관 휴메인은 최근 한국 스타트업 10곳을 직접 뽑아 사우디로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스타트업 한 곳당 최대 200만달러(약 27억원) 규모의 지분 투자와 사업 위탁 의향도 밝혔다.

#. 아랍에미리트(UAE) AI부 장관은 중동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자이텍스에서 한국 AI 기업 4곳과 별도 미팅을 했다. 각 사의 AI 기술을 소개받고 적용 가능성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바이에서 열린 자이텍스에 참가한 한국 스타트업은 77곳에 달한다.

◇ K스타트업에 돈 넣는 ‘큰손’

한국 스타트업들이 AI를 앞세워 중동 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주요 중동 국가가 AI 분야에 막대한 자금을 넣고 공격적으로 기술 선점에 나서면서다. 8일 AI업계에 따르면 사우디 국영 에너지기업 아람코 산하 벤처캐피털(VC)인 와에드벤처스 관계자들은 최근 한국을 찾아 국내 주요 스타트업을 만났다. 와에드벤처스는 지난해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리벨리온에 약 200억원을 투자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중동 투자사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는 “리벨리온 투자 만족도가 높아 추가로 투자할 스타트업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중동은 그동안 국내 스타트업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시장이다. 까다로운 규제와 낯선 문화 때문에 대형 건설사나 방위산업체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곤 번번이 진출에 고배를 마셨다. 최근 중동 국가들이 AI 투자를 늘리고 해외 기술에 관심을 보이면서 국내 스타트업에도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중동은 원래 중국 AI 기업들과 일을 많이 했는데, 최근엔 한국 기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과거엔 스타트업들이 현지로 무작정 나가 ‘맨땅에 헤딩’ 식으로 기업이나 정부 관계자와의 미팅을 모색했다. 지금은 중동 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스타트업들을 쓸어간다. 다음달 휴메인을 비롯한 사우디 정부·기관 관계자들이 방한하는 것도 스타트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다. 휴메인은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사우디 공공투자기금(PIF)이 AI 투자를 위해 올 5월 세운 기관이다. 100억달러(약 13조6350억원) 규모 AI 펀드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중동에서 성과를 내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리벨리온은 1월 아람코의 데이터센터에 신경망처리장치(NPU) 여러 개가 장착된 서버랩을 시범 공급했다. 또 다른 팹리스 기업 퓨리오사AI도 최신 칩인 레니게이드를 검증받고 있다. AI 솔루션 기업 노타는 두바이, 아부다비 교통당국과 AI 기능을 적용한 교통 카메라 공급을 논의 중이다.

◇ AI 인재까지 쓸어 담는 중동

중동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AI 스타트업을 선점하고 있는 것은 신흥 ‘AI 허브’가 되겠다는 야심이 주요 배경이다. UAE의 ‘국가 AI 전략 2031’, 사우디의 ‘비전 2030’ 계획은 AI산업을 ‘차세대 석유’로 정하고 육성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테크업계 관계자는 “중동은 해외 AI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자체 기술 생태계를 조성 중”이라며 “기존 석유 경제에서 기술 경제로의 전환을 노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주요 중동 국부펀드는 지난해 AI 투자 규모를 전년보다 다섯 배 늘렸다. 글로벌 ICT 포털에 따르면 아부다비에 등록된 AI 기업 수는 최근 3년간 연평균 67% 증가했다.

낮은 세금을 앞세워 AI 인재도 빨아들이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AI 보고서에 따르면 UAE는 지난해 기준 인구 1만 명당 AI 인재 유출입이 4.13명으로 전년(1.48명)보다 유입이 크게 늘었다. 플러스 수치는 해외로 빠져나간 인재보다 유입된 인재가 더 많다는 뜻이다. 한국은 지난해 기준 -0.36명이었다. UAE는 무함마드 빈 자이드 AI대학도 세웠고, 사우디는 스탠퍼드대와 협력해 AI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전력이 풍부한 중동은 AI 인프라 구축에도 유리하다. 태양광과 수소 에너지 등을 활용해 전기 요금이 저렴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더운 기후 때문에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열을 관리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풍부한 전기가 이를 상쇄한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대규모 데이터센터 구축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데 ‘오일머니’가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순방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빅테크 관계자들이 대거 동행했다. 이들은 중동 AI 인프라 구축에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공급하고, 현지 AI 스타트업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잇달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순방 직전 미국 AI 반도체의 중동 수출 규제를 완화했다. 테크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중국의 중동 진입을 방어하면서 AI 협력을 본격화하고 있다”며 “중동은 첨단 기술을 받아들여 인프라부터 AI 모델 개발까지 자국 내에서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전반적 기술 이해 아직 낮아”

중동이 미국과 한국 할 것 없이 AI 기업과의 협력을 전방위로 확대하고 있지만 몇 년 후엔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 빅테크와 경쟁해야 할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예컨대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감안해 중동 시장을 노리던 국내 AI 팹리스 스타트업들에 불리한 국면이 닥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벤처투자사 관계자는 “당장은 중동 데이터센터 수요가 늘어난 데 따른 수혜를 누릴 것”이라면서도 “장기적 전략은 따로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네이버 등 국내 대규모언어모델(LLM) 기술 기업이 중동의 소버린 AI 시장을 노릴 때도 미국 빅테크 LLM보다 기술 수준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국내 스타트업이 일부 중동 AI 프로젝트에 참여하더라도 개발된 AI 서비스의 수요가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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