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대 랜드마크] 도살장서 시작된 건축 실험…도시의 기억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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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 대 랜드마크] 도살장서 시작된 건축 실험…도시의 기억을 짓다

심리학자 알렉산더 지겔은 1978년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을 지도로 그리라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중간중간에 기억나는 특별한 장소, 예를 들면 구멍가게, 놀이터, 큰 건물, 신호등 등을 하나하나의 점처럼 그려 넣었다고 한다. 어린 학생은 도시를 랜드마크라는 기억에 남는 주요한 지점들로 엮어서 이해하는 것 같다.

공간에 대한 인식 바꿀 수 있게 하는 매개체

이런 생각을 공원 건축에 이론적으로 적용한 사례가 있다. 1983년 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파리의 라빌레트공원이다. 그는 도살장이던 곳을 공원으로 개발하면서 20세기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공원이어야 한다는 설계 조건에 맞춰 보통의 공원처럼 목가적 풍경의 픽처레스크한 공원이 아니라 탐색의 장소로서 정보가 상호 전달되는 지적인 장소로 만들려고 했다.

프랑스 파리 라빌레트공원의 폴리는 추상적인 그리드 체계의 26개 지점에 설치돼 공원이라는 공간의 존재를 다르게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구글 제공

프랑스 파리 라빌레트공원의 폴리는 추상적인 그리드 체계의 26개 지점에 설치돼 공원이라는 공간의 존재를 다르게 인식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구글 제공

빨강으로 강하게 표현된 10m×10m×10m 크기의 3층 규모 폴리라는 조형물을 추상적인 그리드 체계의 26개 지점에 설치해 이것을 바라보고 기억하며 공원이라는 공간의 존재를 다르게 인식하게 했다. 카페로, 전망대로, 매표소로, 다양한 기능을 품으며 공원을 유기적으로 조합한다. 창조된 기억의 파편들을 공원 곳곳에 심어 도살장 이미지를 지워버리는 새 이미지를 창조해낸 것이다. 폴리는 원래 유럽에서 별 쓰임새 없이 만들어진 공원 내 조형물 같은 것을 일컬었다. 로마 유적지의 탑이나 기둥을 모방해 조형물로 만든 폴리를 추미가 의미를 변형해 도시공간을 기억나게 하는 형체들의 연속극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같은 폴리를 건축물에 현대적으로 적용한 건축가는 1990년 일본 오사카꽃박람회 프로듀서를 맡았던 아라타 이소자키다. 건축가 12명에게 공원 내 오브제를 폴리처럼 만들게 해 폴리의 건축적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다. 결과는 별 소득이 없었다. 조그마한 임시 조형물들이 지어졌을 뿐 도시공간의 요소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승효상 건축가가 골프장을 계획하면서 조각이 있는 공원 개념을 제안해 쉼터 등 조그만 건물들에 여러 건축가를 참여시켜 폴리처럼 만들려고 한 사례가 있지만 이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2011년, 승효상 건축가가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 되면서 광주비엔날레 행사의 일부로 도시공간 내 폴리를 제안했다. 예향 광주의 염원과 맞아떨어져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꾸준한 노력 뒷받침…광주의 새 명물로

광주에 있는 30여 개 폴리 중 몇몇은 다양한 기능을 담고 있어 도시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건축가 문훈이 광주독립영화관 옥상에 설치한 폴리 작품.  김창묵 작가

광주에 있는 30여 개 폴리 중 몇몇은 다양한 기능을 담고 있어 도시 명물로 자리매김했다. 건축가 문훈이 광주독립영화관 옥상에 설치한 폴리 작품. 김창묵 작가

광주시를 방문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조형물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이 폴리다. 승효상 건축가의 폴리는 디자인을 도시공간이라는 현장으로 끌어내려는 의미로 시작됐는데 지금은 도시공간의 재생을 목적으로 독특한 기능을 가진 작은 구조물로 인식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광주의 폴리는 2024년까지 다섯 차례 진행됐다.

광주에는 30여 개의 폴리가 만들어져 있다. 기능 없이 오로지 조형물처럼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몇몇은 다양한 기능을 담고 있어 도시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한 도시에서 폴리를 체계적으로 만들어간 사례가 없기에 광주는 세계적 명성을 얻는 폴리의 메카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도시공간을 이해하고 조직하는 데 폴리가 점의 역할을 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구성 방식이 도심의 특정한 장소만 의미가 있고, 그 주변 보통의 장소는 의미가 없게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을지 우려되기도 한다. 어린아이처럼 지역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기에는 점적인 랜드마크에 초점을 맞추고 기억이 형성될 수 있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지역 전체 영역이 도시 이미지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역, 시청,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 특정 랜드마크 건물에 대한 인식이 도시공간을 이해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지만 북촌, 강남, 신촌 등 한 지역 전체가 좋은 인식을 확보해 사람들에게 좋은 도시공간으로 이해되는 것이 전체적 시각으로 봤을 때 더 좋은 방향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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