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광기, 이제 공급망의 변수 아닌 상수
밖에선 ‘과잉생산국’, 실상 ‘핵심자원 빈국’
효율 집착하다 비축과 다변화 소홀히 한 탓
망각 악순환 끊고 공급 안전망에 투자해야
돌이켜보면, 우리가 배운 비교우위론은 주어진 자원을 전제로 한다. 각국이 잘하는 것을 생산해 서로 교환하면 모두가 이득을 본다는 논리는 자원이 안정적으로 흐른다는 가정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나 자원 자체가 무기가 되는 세계에서 비교우위론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된다. 나는 그 가능성을 오랫동안 교과서 밖의 일로 치부했다. 그것이 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오류가 아닐까 한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통상 환경은 기괴할 정도로 모순적이다. 3월 11일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을 포함한 16개국을 대상으로 무역법 301조 조사를 전격 개시했다. 미 연방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를 위법으로 판결하자마자 꺼낸 새로운 통상 압박 카드다. 외부에서는 한국 제조업이 ‘구조적 과잉 생산’ 상태라며 한국의 수출 활력을 불공정한 위협으로 규정한다. ‘배부른 포식자’ 취급을 받으며 고율 관세의 압박에 직면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절박한 자원 결핍’ 그 자체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한 달째 이어지며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원료인 ‘산업의 쌀’ 나프타 수급은 한계치에 도달했다. 나프타의 77%를 중동에 의존하고, 전체 수요의 45%를 해외 수입에 기댄다고 하니 구조적 취약성은 명확하다. 정부는 3월 13일 ‘석유 최고가격제’를 29년 만에 부활시켰고, 3월 27일 0시부터는 나프타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수급 조정 조치를 발동했다. 외부에서는 ‘과잉’을 꾸짖는데, 정작 우리는 ‘결핍’으로 흔들리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더 뼈아픈 사실은 이러한 교란이 경제적 논리 밖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반도체 공정에 필수적인 네온 가스 가격이 20배 폭등했다고 알려졌다. 나프타 재고가 2주분 아래로 떨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원을 무기화하는 권위주의 체제의 돌발적 통제까지 경제모형에 담아내기는 어렵다. 통상 레이더망 밖에서 날아드는 지정학적 충격 앞에서, 이름 모를 기초 소재의 부재가 반복적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이 현실은 자원 빈국의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숙명이라 인식하는 것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매번 같은 탄식을 반복하는가. 사실 이 취약한 구조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효율을 생존의 조건으로 내면화하면서, 비축과 다변화는 비효율의 상징이 됐다.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세계가 바뀌었다. 위기가 지나가면 기업은 생존을 위해 다시 비용 절감과 효율성의 논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시장이 보상하지 않는 곳에 자발적 투자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다. 정부 역시 다르지 않다. 위기의 기억은 선거 주기보다 짧고, 보이지 않는 위험에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라는 정치적 명령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 시장은 눈앞의 가격 신호에 반응하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는 본래 시장이 가격에 담아내기 어려운 영역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다. 위험을 함께 짊어지는 기업에 실질적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 장기 안전망 투자가 합리적 선택으로 인정받는 환경, 그리고 위기가 지나간 뒤에도 그 설계를 유지하는 정치적 의지,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의 역할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이 고통을 다음을 위한 설계도로 삼을 것인가. 위기는 언제나 망각과 함께 끝났고, 그 망각 위에서 다음 위기는 어김없이 자라났다.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고 말하는 이 순간에도 위기와 망각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선택은 정부만의 몫이 아니다. 출구 없는 덫에 걸린 ‘통상 국가’ 한국에서, 위기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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