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 생태계에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고 한다. 돈이 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비영리 기관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자료를 보면 국내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의 지난해 투자액은 1조9696억원이었다. 1년 전보다 9.2% 쪼그라들었다. 큰손인 대기업 CVC 투자액은 3056억원으로, 활황기이던 2022년(1조7502억원)의 20%에도 못 미쳤다.
올해 들어서도 비슷하다. 좀 다른 통계(벤처투자 플랫폼 더브이씨)지만 상반기 스타트업 및 중소기업 대상 투자는 455건, 2조2403억원에 그쳤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건수로 38%, 금액으로는 27% 줄었다. 벤처 투자가 얼어붙은 건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자본 회수 시장마저 침체 일로여서다. 증시 상장을 통한 투자금 회수가 까다로워지다 보니 벤처캐피털은 신규 투자에 보수적이다. 출자자(LP)도 마찬가지다.
투자 저조해 벤처 생태계 붕괴
2023년 ‘뻥튀기 상장’ 논란을 일으킨 반도체 설계업체 파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상장 당시 해당 분기 매출이 176억원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정작 6000만원이 전부였다. 주가가 급락하고 수많은 피해자가 양산됐다.
벤처업계의 돈맥경화가 심각하지만 사실 시장은 쉬운 해법을 알고 있다. 규제를 풀어 자본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자기자본이 4조원 이상인 초대형 투자은행(IB) 중 ‘적격 금융회사’를 지정한 뒤 단기 금융업(발행어음) 인가를 내줄 수 있는데, 2021년 이후 전무하다. 마지막 승인을 받은 미래에셋증권은 4년 만에야 겨우 자격을 따냈다.
발행어음은 증권사가 자체 신용으로 발행하는 만기 1년 이내 어음이다. 이게 중요한 건 자기자금의 두 배까지 조달이 가능해서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은 일반 채권·부동산은 물론 기업금융에 활용할 수 있다. 유동성이 절실한 벤처기업 등엔 생명줄 역할을 할 수 있다.
발행어음 사업자 자격은 한국투자증권, KB증권, NH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4곳만 갖고 있다. 지난달 말 잔액은 44조원 정도다. 4곳 말고도 ‘정량 기준’을 맞춘 증권사는 삼성증권, 키움증권, 메리츠증권, 신한투자증권, 하나증권 등 적지 않다. 삼성증권만 해도 자기자본이 7조원에 육박한다.
2021년 후 초대형 IB 인가 없어
추가 5곳이 발행어음을 새로 취급하면 어떻게 될까. 이들의 자기자본 평균을 5조원으로만 잡아도 손쉽게 50조원을 시장에 풀 수 있다. 내수 부양을 위한 이번 추가경정예산(31조8000억원)보다도 60% 이상 많은 수치다. 증권사들이 조달한 자금이 벤처기업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을 우려한다면 신규 인가 때 일정 비중만큼 ‘모험자본 투자’ 조건을 붙이면 될 일이다.
이재명 정부는 벤처투자 활성화를 핵심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벤처투자 시장을 연간 40조원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이것만 빼고 다 하라’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겠다고도 했다.
문제는 당국의 눈치보기와 미루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발행어음 규제를 통과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이 대통령 공약인 ‘코스피지수 5000’ 시대를 달성하려면 규제 철폐를 통한 모험자본 확대가 필요하다는 게 시장의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