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서

1 month ago 12

[다산칼럼]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자본을 기업이라는 틀로 결합하고 있다. 기업에서 자본가는 사용자로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약속한 만큼 보상할 책임을 지되, 주인으로서 노동과 결합한 기업의 자산을 자기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경영권을 갖는다. 기업은 사용자가 책임져야 할 노동자의 범위와 주인이 행사할 수 있는 경영권이 미치는 범위가 일치하는 선에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규정한 기업을 조직경제학에서는 노동과 자본을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조직으로 평가하고, 근현대 역사에서 인류가 만든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보고 있다.

지난 8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시행을 앞둔 노란봉투법은 기업을 새롭게 규정한다. 노란봉투법은 2009년 쌍용자동차 점거 농성 사태에서 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시민들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노란 봉투에 성금을 넣어 전달한 운동이 확산하면서 노조의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제한하도록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란봉투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용자 개념을 확대해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도 사용자에 포함했다. 이 법이 시행되면 원청기업이 하청기업 노동자의 법적인 사용자가 될 수 있다. 사용자가 고용하지 않은 노동자도 책임을 져야 하므로, 사용자가 책임져야 할 노동자로 규정한 기업의 범위가 확대된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간 시장에서의 거래가 사실상 원청기업의 고용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원청기업의 주인은 하청기업에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다.

노란봉투법은 또한 노동쟁의의 범위를 확대해 근로조건 자체뿐만 아니라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도 쟁의의 대상이 될 수 있게 했다. 사실 거의 모든 중요한 경영상 결정은 근로조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므로 노란봉투법은 주인의 경영권을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이를 노동자에게 이전한다. 주인의 경영권이 미치는 범위로 규정한 기업의 범위를 축소한다.

노란봉투법은 그간 효율성 원칙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에서 유지돼 온 기업의 범위를 자본가의 책임 측면에서는 확대하고 권한 측면에서는 축소하는 시도다. 기업을 규정하는 자본가의 책임과 권한의 범위에 불일치를 초래해 노동과 자본의 효율적인 결합을 저해할 수 있다.

한국은 왜 기업을 새롭게 규정하려 하는가. 아마 기존에 기업을 규정했던 자본가의 책임과 권한 아래서는 노동자를 보호하고 권익을 신장하는 데 미흡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다단계 하도급이라는 산업구조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달리 기업을 규정해야지만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란봉투법이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노란봉투법은 다양한 범주의 노동쟁의를 합법화하고 노동자가 지는 손해배상 책임을 경감해 사용자를 대상으로 노동자의 협상력을 강화하므로 노동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미 고용됐고 그 고용이 보장된 기득권 노동자는 잃을 게 없어 보인다.

문제는 자본이 새롭게 규정한 기업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란 데 있다. 자본은 태생적으로 노동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다. 자본은 이 기업에서 저 기업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지만 노동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을 기업에 잡아두고 유치하기 위해 주인의 권한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규정된 기업에 자본을 가두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공장이 떠나고 다음에는 기업 자체가 떠날 수 있다. 자본의 무자비함을 나무랄 수 있지만 떠날 수 있어서 떠나는 것을 어찌하랴. 자본이 떠나면 결국 떠나지 못하는 노동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니까.

정부는 노란봉투법을 정책 실험처럼 얘기한다. 기업이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만약 떠난다면 그때 가서 법을 고치면 된다고. 너무 안일하다. 지금이라도 한국 자본이 한국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외국 자본이 한국에 와서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떠나지 못하는 노동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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