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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백승렬]
(서울=연합뉴스) 이충원 기자 = 1997년 프로농구가 출범하기 훨씬 전인 1983년. '점보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농구대잔치가 시작됐을 때부터 한국 농구 최초의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한 염철호씨가 지난 22일 오후 2시50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23일 전했다. 향년 90세.
1935년 1월15일 함흥에서 태어나 월남한 고인은 서울사대부중에 다닐 때 외국인 선교사에게서 배운 농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성동고, 중앙대에서 선수로 뛰었고, 1950년대 말에는 청소년대표로 뽑힌 적도 있다. 이화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1968년 농구부 창단 감독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서울은행(서울신탁은행 거쳐 현 하나은행), 전매청 농구부 창단 감독으로 활약했다. 신용보증기금 감독도 맡았다.
아들 염제인씨에 따르면 1983년 점보시리즈가 시작됐을 때 "입담 좋은 염철호씨가 맡는 게 좋겠다"는 농구계 중론에 따라 1호 장내 아나운서가 됐다. 구수한 말투로 '코트의 감초'로 불렸고, 복잡한 상황이 벌어지면 해설자 역할도 했다. 2014년 12월19일 KBS의 <[취재후] '농구 코트의 조연' 장내 아나운서>라는 기사를 보면 고인이 2000년 12월 농구장에서 "31번 와센버그 루즈볼 파울!…루즈볼 파울이란 리바운드를 서로 다투다가 일어난 파울을 루즈볼 파울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농구 대통령'(허재)이니 '람보 슛터'(문경은)니 하는 선수들 별명도 고인이 지었다. 전희철은 '한국 농구의 자존심'이라고 표현했고, 허재가 뛰어난 플레이를 펼칠 때면 "허재뿐이(허재밖에) 할 수 없는 농구"라고 한껏 치켜세우기도 했다.
인기가 높아지며 사인을 받으려는 팬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아들 염씨는 회상했다. 인기에다 기자들과의 친분까지 겹친 덕에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8년까지 요청이 있으면 간간이 장내 아나운서로 등장했고, 제2의 고향인 대전에서 농구 꿈나무를 지도하기도 했다.
2008년 9월 부인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2009년 뇌경색을 일으킨 뒤로는 농구장에 돌아가지 못했다. 아들 염씨는 "대전에 살면서도 열차를 타고 서울로 매일 오갈 정도로 농구를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셨다"며 "여러 별명 중에서도 '농구 할배'라는 말을 그렇게도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호가 '우림(友林)이었을 정도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술을 즐겼다.
유족은 1남2녀(염제인·염정민·염은민)와 사위 김광욱·박종선씨 등이 있다. 빈소는 대전 건양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24일 오전 7시20분, 장지 대전추모공원. ☎ 042-600-6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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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4월23일 11시27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