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배우들이 '노개런티' 제안에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쓴다고 좋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이 영화는 소박하고 밀도 높은 제작 방식이 맞았습니다."
배우 권해효는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순제작비 단 2억 원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개봉 20일 만에 90만 관객을 돌파했다. 누적 매출액은 93억 원을 넘었고, 2025년 개봉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TOP10에 이름을 올리며 영화계 안팎을 놀라게 했다. 출연 배우와 스태프는 출연료 대신 '러닝개런티', 즉 흥행 성과에 따른 지분을 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초저예산 영화가 거둔 성과에 대해 영화계는 이례적이며 기적 같은 일이라고 평가한다.
권해효는 노개런티로 출연을 하게 된 데 대해 "제가 아는 한도 내 많은 배우들이 제안에 대해 망설인 적은 없다. 단지 많은 관객이 호응해 주셔서 기쁜 상황"이라고 속내를 전했다. 이어 "이 영화는 특별한 방식이다"라며 "가장 독립영화스럽지만 한국의 상업적인 배급망 안에서 이뤄졌다. 혹시 한국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강요된 조건이 되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촬영하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13회라는 짧은 회차지만 그만큼 밀도 있었다. 만약 규모가 커졌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됐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비싼 돈 들여서 좋은 영화 나오는 게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게 아니라 이 영화의 가장 적절한 방식의 제작 스타일을 선택한 것"이라며 "기본 배급 질서 안에서 이 영화는 관객에게 전달될 만하다 이런 것들이 묶인 것 같다"고 부연했다.
영화 '얼굴'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전각 분야 장인으로 살아온 아버지 임영규(권해효·박정민)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이 40년간 묻혀 있던 어머니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야기의 밀도와 묵직한 정서, 그리고 장르적 쾌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팬들은 이를 두고 "'태초의 연니버스'의 귀환"이라 부르며,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이 다시 한국 영화계에 강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평가한다.
권해효는 '얼굴'의 첫 상영 무대였던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떠올렸다. "영화를 처음 본 것도 그 자리였습니다. 1800명 관객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긴장감 넘치는 경험이었죠. 현지 관객들은 부자의 관계나 장례식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한국 관객은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더군요. 추석을 앞두고 다 행복한 가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는 "우리는 특별한 스펙터클이나 대규모 미장센을 보여주지 않았다"며 "클로즈업과 좁은 앵글이 많았는데도 큰 스크린에서 함께 보는 순간 영화는 달라졌다"고 말했다. "시험 성적 기다리듯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앉아 있었는데, 관객이 따뜻하게 받아줘서 참 다행이었어요."
권해효와 연상호 감독의 인연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도' 촬영 당시, 연 감독이 직접 건넨 그래픽노블에서 시작됐다. "저는 만화를 잘 안 보는 편인데, 연상호다운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실사화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걱정도 있었죠. 그림은 독자가 길이를 조절하며 읽지만 영화는 감독의 의도가 일방적으로 전달되잖아요.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까 고민했지만, 결국 '연상호가 드디어 이걸 하는구나' 하는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촬영 현장에서는 감독의 확고한 태도와 동시에 배우에게 허용하는 자유가 특히 인상 깊었다. "연상호 감독은 머릿속에 완벽한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계획된 범위 안에서라면 즉흥적인 순간도 기꺼이 받아들여 줘요. 충돌이 아니라 덧대는 방식으로 작업하니 배우로서 즐겁죠."
이번 작품에서 권해효는 시각장애인 인물을 맡았다. 그는 개인적 경험에서 많은 부분을 끌어왔다. "제 장인어른이 시각장애인이셨습니다. 함께 17년간 살았기에 생활 속 습관이나 몸짓을 자연스럽게 익혔습니다. 영화 속에서 제가 찬 시계도 장인어른이 쓰시던 거예요. 익숙한 공간에서는 지팡이를 잘 쓰지 않죠. 이런 디테일을 담고 싶었습니다."
외형적인 준비도 직접 결정했다. "렌즈를 끼고 분장을 한 날, 거울을 보면서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았다면 머리 모양을 관리하기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 머리를 짧게 잘랐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연 감독도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죠."
영화에서 그는 배우 박정민과 같은 인물을 다른 시점에서 연기해야 했다. "박정민이 1인 2역을 한다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흉내 내거나 계산한 건 없었어요. 다만 박정민의 아버지도 시각장애인이셨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각자 경험이 자연스레 연기에 스며든 것 같습니다. 토론토에서 영화를 볼 때는 '정민이가 날 닮았나, 내가 정민이를 닮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후반부 15분간 이어지는 독백 장면은 관객에게 강한 울림을 남겼다. 그는 "두 번의 롱테이크로 끝냈다"며 "리허설도 없었고, 혼자 떠드는 장면이기에 가능했다.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했지만 결국 땅에 발붙이는 마음으로 갔다"고 설명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롱테이크 제안받으면 어쩌냐는 질문에 "다른 건 몰라도 외우는 건 잘하는 편이다. 농담으로 연극계에서 대본 빨리 외우는 배우 3명 중 1명이라고 한다. 나머지 2명은 누군지 모른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홍상수 감독은 아침에 대본을 써서 준다. 그래서 15분 동안 롱테이크 연기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홍 감독 영화에선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권해효는 흔히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린다. 그는 그간 홍 감독과 함께 11편의 영화를 찍었다. "홍 감독 작업은 매번 힐링 같은 경험입니다. 어떤 장면을 찍을지 모른 채 아침에 대본을 받는 자유로움이 있어요. 연상호 감독은 머릿속 그림이 명확하지만, 즉흥을 받아들입니다. 두 분 모두 독립 영화적 뿌리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죠.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평생 매일 같이 후회해요. 왜 이 장면을 이렇게 찍었지, 하고요. 온갖 생각을 다 하기 마련인데 홍 감독과 연 감독의 현장에선 후회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최근 한국 영화계는 100만 관객을 넘기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얼굴'은 90만 관객을 모으며 가능성을 증명했다. 권해효는 "우리가 만든 건 화려한 프랜차이즈 요리가 아니라 재료의 순수한 맛을 살리는 손맛이 들어간 작품이다. 그 맛을 좋아하는 관객이 있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그 믿음이 통하는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자극적이고 달고 맵고 이런 맛을 기다릴 거라는 것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이거야'라고 해서 조심스럽게 접시를 내놨는데 '내가 잊었던 맛이다. 오랜만이다'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5년째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고 있다. 올해 영화제는 오는 11월 27일 열릴 예정이다. "30대 때 시작했는데 이제 60대가 됐습니다. 흰머리 아저씨가 무대에 서서 청년 영화인들에게 '어서 와. 너희들은 망했어. 그러니 같이 놀아볼까'하는 마음입니다."
영화제에는 '배우 프로젝트 - 60초 독백 페스티벌'도 열린다. 이는 권해효의 제안으로 2018년부터 시작된 신인 배우 발굴 프로그램이다. "드라마, OTT, 영화 등 플랫폼이 많아졌지만 정작 배우들이 설 자리는 더 좁아진 느낌입니다. 연결고리를 어떻게 만들어줄까 고민하다가 시작한 게 독백 페스티벌이었죠."
참여 규모도 눈에 띄게 커졌다. 2018년 첫해엔 1200명이었는데, 올해는 7900명이 접수했다. 권해효는 "지난해부터는 1분짜리 영상 제출 방식으로 바뀌면서 더 많은 배우가 참여하게 됐다. 다 봐야 한다. 그중에 24명이 발탁되는데 영화제 기간 함께 만나 자기 것을 찾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의 의미를 강조했다. "보통 오디션은 역할을 따내기 위한 자리잖아요. 하지만 이건 배우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무대입니다. 자신 있는 대사,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을 통해 매력을 드러내죠. 그렇게 뽑힌 24명은 영화제 기간 함께 어울리며 자기 목소리를 찾아갑니다.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저도 늘 자극받아요. 기분 좋은 일이죠."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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