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5000만 명 가운데 이탈 부자 2400명. 이 숫자만으로는 많은지 적은지 판가름하기 어렵다. 다만 국제 비교를 하면 심각해진다. 올해 백만장자가 가장 많이 이탈하는 국가는 영국으로, 1만6500명이 해외로 떠난다. 2위는 중국(7800명), 3위 인도(3500명)다. 한국은 전쟁 중인 러시아(5위·1500명)보다 많은 세계 4위 부자 순유출국이 됐다. 인구 대비로 영국 다음 세계 2위 수준이지만 여전히 그렇게 많은 수인지는 쉽게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떠나는 부자, 1년에 2400명’이란 문장에서 부자란 단어를 기업인으로 바꿔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떠나는 기업인, 1년에 2400명. 신문 1면 헤드라인 제목감이다. 그런데 실제로 해외 투자이민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면 이민 상담자 상당수가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기업 대표들이라고 한다. ‘한국이 싫어서’ 고국을 등지는 부자 2400명의 실체가 우리 지역 공단에 있는 거래처 김 사장이라는 얘기다.
기업인들의 한국 이탈은 고령화와 맞닿아 있다. 2023년 한국 중소기업 대표자 10명 중 4명이 60세 이상이다. 10년 만에 두 배가 됐다. 상속을 앞둔 중소기업 대표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1번, 최대 50% 상속증여세를 내고 한국에서 자식에게 부를 이전한다. 2번, 기업을 처분하고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가서 부를 이전한다. 2022년 400명이던 한국 이탈 백만장자가 2025년 2400명이 된 것은 현실에서 2번을 택하는 기업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올해 이렇게 한국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산이 152억 달러(약 20조6000억 원)로 추산된다.백만장자 이탈 1위 국가 영국에선 요즘 ‘웩시트(WEXIT)’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부자(Wealthy)의 자국 이탈(Exit)을 합성한 단어다. 일본 니혼게이자이(닛케이)에 따르면 전 세계 웩시트 건수가 올해 14만2000건으로 역대 최대다. 한국의 유출 속도가 유독 빠르지만 전 세계에서 부자 유치 쟁탈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그동안 기업인들을 한 국가에 묶어 두던 애국심, 국민 정서 등의 안전 장치가 이제 무력화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기적으로는 상속세 개편으로 한국을 떠나는 기업인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매년 2400명인 부자 유출이 2만4000명이 되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인이 국가를 빠져나가는 것은 해당 국가에 더 이상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부자 유출 1위 국가였던 중국은 올해 선전(深川)과 항저우(杭州)의 기술 스타트업 기업들이 부상하면서 1위 오명을 벗었다.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기업가정신 부활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박재명 산업1부 차장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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