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어린 서사[이준식의 한시 한 수]〈338〉

3 weeks ago 8

가을밤이라 좀체 동은 트지 않고, 물시계는 어느새 이경(二更)을 향한다.

홀로 앉아 노닐던 산수를 추억하노라니, 적막 속에 들리는 건 벌레 소리뿐.

나뭇잎 떨구는 동정호(洞庭湖)의 바람, 구름을 빠져나온 천모산(天姥山)에 뜬 달.

강물처럼 동쪽으로 떠돌며 갈 나 자신, 어떻게 그대에게 이 마음을 전할까.

(秋宵已難曙, 漏向二更分. 我憶山水坐, 蟲當寂寞聞.

洞庭風落木, 天姥月離雲. 會自東浮去, 將何欲致君.)―‘저녁 상념(석사·夕思)’ 가도(賈島·779∼843)


시인의 고뇌 어린 독백이 아릿하게 다가온다. 긴 가을밤, 좀처럼 밝아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에게 옛 시절의 산수 풍광이 아련히 피어오른다. 그 풍경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꿈꿨던 삶의 그림자처럼 아득하다. 지금은 벌레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밤, 그 고요는 내면의 공허와 맞닿고, 추억은 현재의 상실감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문득 동정호의 바람과 천모산의 달을 떠올린다. 떠돌이 시인의 정처 없는 삶의 암시이면서 또 자연으로의 귀소 본능을 자극하는 존재들이다. 강물처럼 떠돌 뿐, ‘어떻게 그대에게 이 마음을 전할까’라며 체념에 잠긴 시인, 이 순간 그가 그리는 대상은 누구일까. ‘그대(君)’라는 말은 단순한 2인칭이기도 하지만 또 ‘임금’을 지칭하기도 한다. 무본(無本)이라는 법명으로 승려 활동을 하다 대문호 한유(韓愈)의 권유로 환속했던 가도. 험난한 관직 생활로 각지를 떠돌았던 그이기에 이 시는 뜻을 이루지 못한 시대적 낙오자들의 공통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