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산업정책과 기업정책의 미래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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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들은 최근 '첨단산업 육성'을 기치로 과감한 산업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민주권정부도 2030년까지 인공지능(AI) 분야에 100조원을 투자하겠다 했다.

미국은 트럼프 2기를 맞아 반도체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세정책 등으로 반세기 만의 대규모 제조업 투자 부흥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정책 덕분에 제조공장의 미국 복귀와 지역 경제활성화가 가속되고 있지만 산업공급망을 떠받치는 전체 노동자 60%를 고용하는 중소기업 지원이 충분치 않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정책 연구자들은 “대규모 산업 변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소기업 역량 강화를 위한 '중소기업 마셜플랜'이 필요하다”며 촉구하고 있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굳건한 제조업 기반과 중견강소기업(Mittelstand)으로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탈탄소 정책 이후 2년 연속 경제 역성장을 겪고 있다. 에너지 비용 상승과 과도한 규제가 특히 제조 중소기업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진단이지만 독일의 산업정책 저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산학연 협력의 뿌리와 히든 챔피언으로 불리는 수많은 강소기업들이 첨단 기술변화에 적응하며 혁신을 거듭하고 있으며 첨단산업과 전통 제조업의 조화로운 균형 발전을 모색해 왔음을 시사한다.

세계적으로 제조 강국으로 불리는 4개국(독일, 일본, 한국, 중국) 가운데 연구개발(R&D) 규모나 정부의 지원이 취약한 한국이 소부장 분야 육성을 도외시 할 경우 그 결과는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최근 3년간 대한민국 정부의 산업·기업 정책은 '초격차 프로젝트'와 '국가전략기술 중심의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산업 드라이브'로 달려왔다. 실제로 2024년도 정부 예산안을 보면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산업 분야 예산은 전년 대비 10.3% 삭감됐지만,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전략산업 지원 예산은 오히려 증액됐다. 2024년 정부 R&D 총예산은 전년 대비 16.6%나 삭감돼 25조9000억원 수준으로 대폭 줄었는데, 국가전략기술 R&D 예산은 오히려 증액됐다. 첨단편중이라는 비판과 동시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평가가 교차됐다. 반면, 전통 제조업이나 기타 산업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으로 축소돼 정책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산업부의 중견기업·지역산업 육성 예산, 중기부의 일부 중소기업 지원사업 등은 예산 구조조정 대상이 됐고, 그 결과 비첨단 소부장 분야는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이처럼 첨단산업 위주 정책기조가 지속될 경우 산업생태계에 미칠 수 있는 위험과 부작용도 살펴봐야 할것이다.

첨단산업 중심의 정책을 앞으로도 지속한다면, 전통 제조업 및 중소·중견기업 부문의 경쟁력 저하로 인한 여러 위험 요소가 5년 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장 직접적인 우려는 제조업 고용 감소와 산업 생태계 약화다. 경기 부진으로 제조업 고용이 급감하고 있는 것인데, 자동화 등 구조적 요인까지 감안하면 향후 고용 감소세는 더욱 가팔라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 한 산업전망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 인력은 향후 10년간 약 24만명 순감소할 것으로 예측됐다.

첨단산업 중심의 성장이 양질의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제조업 일자리의 공동화현상이 가속돼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될 수 있다. 중소·중견 제조업체의 줄도산 또는 경쟁력 약화도 현실적인 위험이다. 산업 전반에 “첨단산업과 대기업만 잘 되면 된다”는 분위기가 만연하면, 수많은 전통 중소기업들은 투자와 혁신 의욕을 잃고 도태될 수 있다. 이는 국가 산업저변의 축소를 의미한다.

한국 산업구조는 대기업이 생산과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중소·중견기업은 주로 고용을 떠받치는 양극화 구조가 특징이다. 그 중간을 메워줄 중견기업층이 취약하다는 문제가 오래 제기돼 왔다. 늙고 활력없는 경제, 고용과 성장이 없는 상황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종업원 50인 미만 영세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의 99.9%를 차지하는 반면, 250인 이상 중견·대기업 비중은 0.1%에 불과해 주요 선진국 대비 현격히 낮다. 다시 말해 '허리가 없는 경제'인 셈인데, 이 허리 역할을 하는 강소·중견 제조기업 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산업생태계의 기반이다. 첨단산업 위주 정책으로 이들 중견기업층이 성장 사다리를 타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오히려 중소기업들이 첨단 대기업과의 격차 심화로 경쟁력을 상실한다면 산업 전반의 성장엔진이 약화될 위험이 크다. 전후방 산업연관 효과를 봐도, 소수 첨단산업이 아무리 성장해도 다른 다수 제조업 분야가 위축되면 국내 부품·장비 조달망이 붕괴되어 첨단산업 자체의 경쟁력도 약화될 수 있다. 첨단산업 편중 정책이 지속되어 산업 구조가 더욱 편협해질 경우, 5년 내 성장률이 저하되고 경기 변동성이 증대되어 경제 전반의 리스크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경고다. 즉, '포트폴리오가 편중된 경제'는 안정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향후 5년 간 첨단산업 위주 정책기조의 계속될 경우 ①제조업 고용 축소 ②중소·중견 생태계 위축 ③기술·공급망 공백 위험 ④거시경제 성장세 둔화 및 변동성 확대라는 네 가지 주요 위험을 내포한다. 물론 첨단산업 육성 자체는 국가 미래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 이면에서 잠복하는 이런 부작용들을 간과할 경우 5년 후 한국 제조업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균형 잡힌 산업·기업 정책 방향에 대한 4가지 제언균형 잡힌 산업·기업 정책 방향에 대한 4가지 제언

그렇다면 첨단산업 육성과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를 어떻게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까? 균형 잡힌 산업·기업 정책 방향으로 다음의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성장사다리' 복원을 통한 한국형 히든챔피언인 중견기업 육성 강화가 시급하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인 중견기업 부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첨단도 전통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중소→중견→대기업으로 자연스러운 성장사다리가 이뤄지도록 제도적 장치를 정비해야 한다.

둘째,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스마트化'와 기술혁신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첨단산업에 밀려 구태의연한 산업으로 낙인찍힌 전통 제조업을 그대로 둔다면 우리 경제의 저변은 급속히 약화될 것이다. 일본은 중소기업의 DX 추진율 제고를 국가적 과제로 삼아 IT컨설팅과 자금지원을 강화하고 있는데 한국도 유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셋째, 수출 품목 및 시장의 다변화 전략이 절실하다. '수출 다변화'는 구호로 그쳐서는 안 되며, 정책의 지향점으로 삼아 구체적 실행에 옮겨야 한다. 수출의 저변 확대 지원은 곧 내수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에게 글로벌 기술교류를 통한 시장 진출과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이는 국가 경제의 복원력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넷째, 첨단산업 전략 추진 방식에도 균형 감각을 도입해야 한다. 첨단산업을 키우는 것 자체는 필수적이지만, 그 추진 방식이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기업-첨단-중소기업 간 상생 생태계 구축을 한층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첨단 분야에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지원할 때 중소기업 참여를 의무화하거나 인센티브를 부여해 첨단산업의 성과가 협력사에 파급되도록 설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의 첨단 강국인 동시에, 수십만 제조 중소기업이 받쳐주는 전통 제조 강국이기도 하다. '두 개의 축'이 조화를 이룰 때 한국 산업의 경쟁력이 극대화될 것이다. 한쪽 축만 굴리는 편향은 단기간 성장률을 높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산업 지속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균형 잡힌 산업정책이란 첨단기술 선도와 산업저변 강화를 두 마리 토끼로 삼고, 단기 성과와 중장기 기반 구축을 함께 도모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첨단과 전통의 균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 과제이다. 첨단산업으로 경제 체질을 바꾸는 일과 기존 산업을 혁신해 새로운 활로를 찾는 일은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성장 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첨단산업의 영광 뒤에 가려진 수십만 개의 중견·중소공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땀과 기술이야말로 한국 제조업의 숨은 힘이다. 첨단산업과 기업정책이 함께 숨 쉬는 산업 강국,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정부의 현명한 R&D전략 운용과 균형 잡힌 정책 추진으로 5년, 10년 뒤에도 한국 제조업이 굳건한 생태계를 유지하며 번영하기를 기대해 본다.

오한석 한양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 ohsim2004@gmail.com


〈필자〉2005년부터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서 기술개발센터장, 정책기획실장, 중견기업단장 등 국가연구개발 정책·기획·평가, 기술개발, 중견기업 육성 지원업무를 두루 수행했다. 현재 월드클래스기업협회 자문교수,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 비상임 이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청렴옴부즈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1년 5월부터 단국대 대학원 과학기술정책융합학과 전담교수로 근무했으며 2025년 3월부터 한양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6년 중견기업육성 유공 국무총리 표창, 2019년 소재부품기술개발 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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