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 AI, 챔피언 '몰빵'으론 안돼…한국형 AI생태계부터 키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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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왼쪽)와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경기 성남시 리벨리온 사옥에서 ‘소버린 AI’를 주제로 인터뷰하고 있다.   리벨리온 제공

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캐피탈 대표(왼쪽)와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가 경기 성남시 리벨리온 사옥에서 ‘소버린 AI’를 주제로 인터뷰하고 있다. 리벨리온 제공

프랑스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캐피탈 대표가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와 인연을 맺은 건 2023년이다. 유능한 한국 엔지니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경력을 쌓은 뒤 고국으로 돌아와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을 창업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리벨리온에 투자를 집행한 펠르랭 대표는 프랑스 AI 기업 미스트랄에도 투자했다. 지금 리벨리온과 미스트랄은 한국과 프랑스에서 ‘소버린 AI’를 상징하는 대표 기업이 됐다. 이달 초 경기 성남시 리벨리온 사옥에서 만난 펠르랭 대표와 박 대표는 “소버린 AI는 꼭 필요하지만 흑백논리만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했다.

▷리벨리온과 미스트랄에 모두 투자했죠.

펠르랭 대표=AI 생태계의 탄생을 보면서 두 기업 모두 놓쳐선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미스트랄은 미국에서 훈련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프랑스 엔지니어들이 만든 훌륭한 팀이에요. 리벨리온도 비슷하죠. 엔비디아와 경쟁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대만 외엔 거의 없어요.

박 대표=글로벌 벤처캐피털(VC)인 코렐리아의 투자를 받은 게 유럽은 물론 미국까지 글로벌 네트워크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미스트랄은 프랑스 AI를 상징하는 기업인데요.

펠르랭 대표=미스트랄은 제가 디지털경제 특임장관이던 2012년부터 프랑스 정부가 추진해온 혁신 정책의 흐름 위에서 성장했어요. 창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전략적으로 투자했고 후임 장관들이 정책을 이어갔죠. 프랑스 정부는 소버린 AI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했어요. 문화적 편향을 줄이기 위해선 다양한 AI 모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요. 미스트랄의 성장은 이런 정책적 환경과 인재, 투자, 비즈니스 모델이 모두 맞물린 결과입니다.

▷소버린 AI에 일찌감치 주목했군요.

펠르랭 대표=전 AI가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꿀 거라고 봐요. 정치·과학·노동 환경의 변화를 넘어서 사람들의 정신 구조까지 뒤흔드는 혁신이죠. 이 시스템을 외국 기업, 특히 특정 최고경영자(CEO)들의 이념에만 좌우되도록 놔두는 건 위험합니다. 어떤 의도를 갖고 기술을 사용할지 모르니까요. 각 국가가 기술적 독립성과 통제권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국민의 데이터가 어디에 저장되는지, 어떻게 취급받는지 통제할 수 있어야 하죠.

박 대표=미국이 아무리 무기를 잘 만든다고 하더라도 한국도 자체 무기를 만들어 안보를 지켜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설사 무기의 성능이 미국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지금 한국 주요 산업이 발전한 배경엔 박정희 대통령이 깐 고속도로 물류 인프라와 김대중 대통령이 구축한 인터넷 인프라가 있잖아요. 새 정부가 깔 AI 인프라 역시 소버린 관점이 필요합니다.

▷국내 생태계만 강조하면 갈라파고스가 될 것이란 우려도 있습니다.

박 대표=소버린 AI라고 해서 엔비디아 칩은 빼고 리벨리온 칩만 쓰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챗GPT를 끊고 한국형 대규모언어모델(LLM)만 쓰자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엔비디아 칩이나 챗GPT에 100% 종속되지 않게 다른 선택지가 있어야 합니다. 70%가 엔비디아 칩이어도 30%의 대체재가 존재한다면 엔비디아 칩도 더 좋은 조건에 사올 수 있어요.

펠르랭 대표=흑백논리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저는 특정 외국 기업에만 의존하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아요. 독점이 갖는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일정 부분 고립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소버린 AI는 지킬 만한 가치입니다. 미스트랄이나 리벨리온처럼 대안 플레이어들의 존재가 독점을 견제할 유일한 방법이고요.

▷빅테크와 경쟁할 수 있을까요.

펠르랭 대표=엔비디아 칩을 누가 더 많이 사느냐의 싸움이라면 당연히 미국 빅테크가 이기겠죠. 미스트랄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AI 모델 일부를 오픈소스로 공개해서 다양한 활용 사례를 자생적으로 낳는 거예요. 많은 프랑스 기업이 미스트랄 모델을 활용해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챗GPT나 클로드와 병행해 쓰기도 하고요. 중요한 건 단 하나의 파운데이션 모델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거죠.

▷한국 정부도 AI 독립을 추진 중인데요.

펠르랭 대표=한국엔 자국 기술과 솔루션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요와 선호가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검색엔진 시장에서 네이버가 구글을 누른 것도 정부가 도와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잖아요. 정책을 잘 설계하면 사람들의 AI 접근성과 이해도를 높이고 좋은 활용 생태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완전한 소버린 AI가 가능할까요.

펠르랭 대표=프랑스에선 불가능에 가까워요. 칩도 없고, 이제야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들기 시작한 수준이거든요. 하지만 가치와 원칙을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동맹’은 가능합니다. 코렐리아캐피탈을 설립한 것도 프랑스와 한국이 협력해 미국 빅테크의 독점에 대응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언젠가는 프랑스 데이터센터에서 리벨리온의 칩을 사용하는 날도 올 겁니다.

▷한국과 협력할 여지가 많겠군요.

펠르랭 대표=미스트랄은 프랑스어, 영어뿐만 아니라 아시아권과 아랍권 언어 데이터 세트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협업할 가능성도 크죠.

▷현재 한국의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박 대표=AI산업에 한해선 대한민국 자체가 스타트업입니다. 한국이 가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다 합쳐봤자 메타가 가진 GPU보다 적어요. 스타트업 정신대로 경쟁보다 협업 구도를 만들어주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경쟁시켜 이긴 기업 한 곳만 ‘K미스트랄’로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기업이 협업할 장을 깔아줘야 합니다.

▷생태계가 중요하다는 얘기네요.

펠르랭 대표=정부가 특정 회사를 ‘챔피언’으로 지정하고 자금을 몰아주는 방식은 잘 작동하지 않아요. 제가 장관이었을 때 ‘프랑스판 네이버’ ‘프랑스판 카카오’를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대신 공공투자은행인 BPI프랑스를 설립해 창업 초기기업과 상장사에 다양하게 투자할 수 있게 했죠. 이 덕분에 프랑스 혁신 생태계가 풍성해졌고, 투자사들도 성장했습니다. 규제 역시 혁신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펠르랭 대표=저라면 가장 먼저 인프라에 투자할 겁니다. 전기가 들어오고, 반도체가 작동하고, 데이터를 돌릴 수 있는 인프라죠. 인프라가 없으면 애플리케이션도, 생태계도 생기지 않아요. 스타트업은 GPU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요. 너무 비싸거든요. 정부가 할 일은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업들이 쓸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돈 안 되는 것’에 투자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정부니까요.

박 대표=AI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는 보기에 재미있어요. 하지만 오래 걸리는 인프라 투자는 상대적으로 재미없죠. 재미없지만 아주 중요한 것들에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플뢰르 펠르랭 전 특임장관은

프랑스 최초의 한국계 장관 출신으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 통상·관광 담당 국무장관, 문화·커뮤니케이션부 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의 정보기술(IT) 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테크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정책인 ‘라 프렌치 테크’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이후 글로벌 벤처캐피털(VC) 코렐리아캐피탈을 설립하고 미스트랄(프랑스), 리벨리온·마이리얼트립(한국), 볼트(에스토니아), 겟유어가이드(독일) 등 유니콘 기업에 투자했다.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기컴퓨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뒤 인텔 랩스 연구자, 스페이스X 인공위성용 칩 설계자 등으로 경력을 쌓았다. 모건스탠리에선 금융 반도체 담당 임원으로 초단타 매매에 특화한 알고리즘 설계와 관련 인공지능(AI) 칩 개발을 주도했다. 2021년 리벨리온을 창업한 뒤 추론에 특화한 AI 반도체 ‘아톰’을 설계해 상용화에 나섰다. 리벨리온은 지난해 사피온코리아와 합병해 국내 최초 AI 유니콘 기업에 등극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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