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순은 일본에서 귀화한 평원해(平元海)의 아들이었다. 평원해는 대마도 출신의 승려로 의술이 뛰어나 전의박사(종8품)에 임명됐다. 조정은 그에게 정착할 땅까지 하사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2년 만에 전의감의 책임자인 판전의감사(정3품)에 올랐다. 태종의 주치의로 활약한 평원해는 왕에게서도 극찬을 받았다.
태종은 그를 이렇게 칭찬했다. “네가 의(義)를 사모해 귀순한 뒤 내가 잠저(潛邸·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증상을 살피며 약을 조제해 왔다. 날이 갈수록 근신하고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다. 또 백성 중 병든 이들을 돌보아 자못 효험이 있었으니, 그 공로가 상을 줄 만하다.”
평순 역시 아버지 평원해의 뒤를 이어 의원이 됐다. 실력 또한 뛰어나 벼슬이 종3품까지 올랐다. 귀화한 지 오래됐지만, 본향이 일본이라 여러 불편이 따랐다. 결국 평순은 새 본향을 따로 달라고 청해 창원을 본향으로 받았다.그런데 하필 그가 치료에 실패한 환자 설순 또한 귀화인의 후손이었다. 설순의 할아버지 설손(偰遜)은 본래 위구르 사람으로, 고려 말 홍건적의 난 때 귀화했다. 설손 일가는 바이칼호로 흘러드는 셀렝가강 유역에 살았기에 성을 ‘설’로 정했다. 설손은 뛰어난 문장가이자 외교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자손들 또한 대대로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다. 설손의 아들 설장수는 경주를 본향으로 받아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됐다. 뜻밖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설순은 설장수의 조카였다.
전근대 사회는 흔히 ‘혈통 중심 사회’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다. 기술과 재능을 지닌 인재가 찾아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어 나갔다. 평원해는 처자와 함께 귀화해 정착할 땅을 내주었고, 홀로 귀순한 자에게는 아내를 찾아주며 정착을 도왔다. 일본 출신의 평씨 가문은 의술로, 위구르 출신의 설씨 가문은 외교로 조선의 신임을 얻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이라는 새 나라가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다문화 가구는 44만 가구, 국내 거주 외국인은 전체 인구의 4%인 20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90%가 생산연령 인구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이 귀화인에게 새 본향을 내주었듯, 이제 우리도 함께 살아갈 이웃에게 ‘마음의 본향’을 내줄 때다. 조선이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했다면, 오늘의 한국은 국적보다 함께 살아갈 의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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