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유근형]정치 생명 걸고 ‘긴축’ 외치는 마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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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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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최근 에리크 롱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늘어나는 재정적자를 우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7대 경제 대국인 프랑스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등 IMF 총재만 다섯 명을 배출하며 국제 경제 질서를 좌지우지한다고 자부했던 프랑스의 자존심 또한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구제금융 위기의 佛

롱바르 장관의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현재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8%에 달한다. 유럽연합(EU) 평균인 3%의 2배에 이른다.

국가 부채 또한 GDP의 약 114%다. 약 6800만 명인 프랑스 국민이 1년 내내 번 돈을 모두 부채 상환에 투입해도 갚지 못한다는 의미다. 114%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직후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어 ‘유럽의 돼지들’이라는 모욕적인 평가를 받았던 스페인(약 104%), 포르투갈(약 96%)보다 나쁜 수치다.

다만 이 위기를 대하는 프랑스 집권 세력의 자세는 인상적이다. 정권을 잃을 위기를 수차례 겪으면서도 국민의 인기가 없는 긴축 정책을 끈질기게 추진하고 있다. ‘정치적 자살 행위’라는 일각의 냉소적 평가 또한 있지만 ‘죽어도 미래 세대를 위해 할 일을 하다 죽겠다’는 결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우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23년 초 절대다수의 국민이 반대하는 연금 개혁을 강행했다. 집권당 르네상스가 이끄는 중도 범여권 ‘앙상블’ 또한 거센 국민 반발로 이듬해 총선에서 다수당 지위를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셸 바르니에 전 총리를 앞세워 긴축 정책을 추진했다. 이 여파로 바르니에 전 총리는 지난해 12월 의회의 불신임으로 사퇴했다. ‘인기는 떨어졌지만 가야 할 길을 갔다’, ‘정치 자산과 개혁을 맞바꿨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프랑스 집권 세력은 8일 또 한 번의 모험에 나선다. 바르니에 전 총리의 후임자인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정부 예산을 삭감해 연금, 복지, 의료 혜택 등을 동결하는 긴축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그는 정책 집행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에 선제적으로 자신의 신임 투표를 요청했다.

의회 3분의 2를 점한 야당이 반대표를 던지면 바이루 총리를 포함한 내각 총사퇴가 불가피하다.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퇴진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그런데도 “적자 감축에 정권의 운명을 걸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재정 건전성 무관심한 韓

프랑스 집권 세력의 ‘사즉생(死則生) 긴축’은 당장 국민들이 환호할 정책에만 치중하는 한국의 정치 지형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 정치권에서는 소비쿠폰 등 현금성 지원 정책이 ‘선거의 치트키’가 된 지 오래다.

여야를 막론하고 ‘재정 건전성’ 문제를 거론하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복지 확대에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수혜자에 대한 과학적 추산, 재원 마련책의 유무 등 최소한의 검증은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사라지고 있다. 국민들이 현금성 지원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황에서 ‘복지 정책을 제대로 검증하자’는 말 한마디로 ‘반(反)복지주의자’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현금 복지가 일종의 ‘뉴노멀’로 자리 잡는 사이 한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올해 50%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가만히 있어도 복지 지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선심성 정책에 대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국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높다. 마크롱 대통령처럼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개혁에 나서는 지도자의 부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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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형 파리 특파원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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