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저신용자 고금리는 왜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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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9.17 17:30 수정2025.09.17 17:30 지면A31

기원전 18세기에 만들어진 함무라비법전은 가장 오래된 법전인 동시에 이자율을 정한 최초의 법전이다. 은은 연 20%, 곡물은 연 33.3%가 상한선이었다. 은보다 곡물의 이자율이 높은 것은 작황에 따라 곡물을 되돌려받지 못할 위험까지 고려한 것이었다.

[천자칼럼] 저신용자 고금리는 왜 정당한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위험을 감안해 이자율을 정하는 금융업의 본질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못 갚을 위험이 높은 저신용자에겐 상대적 고금리가, 떼일 위험이 작은 고신용자에겐 상대적 저금리가 적용된다. 부자가 고신용자로 평가받을 확률이 높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재산이 많지 않더라도 거래 실적이 깨끗하고 별문제가 없으면 고신용자가 될 수 있다.

은행 등 금융회사는 대출자 전체로부터 받는 원리금을 적정하게 유지하고, 대출 총액에 비례해 수익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출자 전체는 하나의 풀(pool)이다. 저신용자가 고금리일지언정 대출받을 수 있는 것은 고신용자가 내는 안정적 이자 덕분이다. 잔인하거나 역설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이며 어떤 의미에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험에 따른 금리차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글로벌 금융시장이다. 최근 국가 신용등급이 강등된 프랑스의 국채 금리는 유로존에서 국가채무 비율이 가장 높은 그리스의 국채 금리보다 높다. 국채 금리는 통상 해당국 회사채 금리보다 낮게 형성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프랑스 국채는 로레알 에어버스 악사 등 프랑스 기업이 발행한 채권보다 금리가 높아졌다.

위험에 따른 금리차를 없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신용자들이 너도나도 대출을 신청할 것이다. 대출자 선정은 추첨이나 알음알음으로 해야 할까. 난장판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보다 고신용자들이 국내 금융시장을 떠날 수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한국 정부 입김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선 신용도에 따라 훨씬 낮은 금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 이들의 탈출은 저신용자의 대출 기회마저 막는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 안타까움과 선의(善意)만으로 정책을 펴다간 이처럼 파멸적 결과를 만들 수 있다.

박준동 논설위원 jdpow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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