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1기였던 2019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원자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향후 1000억달러 규모로 원전 16기를 짓겠다는 사우디의 야심에 트럼프 대통령은 수출 후보인 자국 웨스팅하우스(WEC)를 총력 지원했다. 미국 원전업계 또한 로비력을 총동원해 트럼프를 구워삶았다. 사우디가 핵 비확산 규제이자 원전 건설의 전제조건인 이른바 ‘123 협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음에도, 트럼프는 미국 기업이 사우디에 원자로를 수출할 수 있도록 사업을 승인했다.
이후 중동의 핵 개발 확산 우려가 커지면서 결국 사우디 원전 건설은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핵 비확산 규제보다 원전 수출을 더 중시한 것은, 자국 원전 산업 육성이 국가 차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 간 ‘불공정 계약’ 또는 ‘매국 계약’ 논란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그런데 2019년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었던 릭 페리의 발언. 그는 당시 최대 경쟁자 중 하나이던 한국형 원자로에 대해 “한국은 미국 기술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우디가 미국 정부와 123 협정을 맺지 않는 한 원전을 자유롭게 건설할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미국 정부의 허락 없이는 한국이 원전을 수출할 수 없다는 의미다.
조 바이든 정부에선 그런 입장이 달라졌을까. 아니라고 본다.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지식재산권 소송이 한창이던 2023년 산업통상자원부를 출입하게 됐다. 정부 일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원전은 그중에서도 ‘톱 시크릿’에 속한다.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원전 독자 수출 기대감은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성대한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웨스팅하우스와의 꼬인 실타래는 풀리지 않았다.
왜였을까. 미국이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시점상 기사화하진 않았지만, 당시 산업부의 미국 에너지부 내 카운터파트는 원자력의 상업적 이용을 담당하는 ‘원자력국’(NE)이 아니라 ‘국가핵안보국’(NNSA)이었다. 안보의 관점으로 핵 확산을 막는 조직에서 이 사안을 다룬다는 것은 미국이 한국 원전의 독자적 수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양 기업 간에 풀 일”이라는 미국의 원론적 접근 속내에는 자국 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원자로 패권을 가져가야 하고, 나아가 미국이 글로벌 원전 산업을 주도해야 한다는 명확한 방향성이 담긴 셈이다.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게 있다. 원전은 자동차나 스마트폰처럼 잘 만들면 소비자에게 마구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전은 고도로 정치적이고, 국제 안보와 밀접하다 못해 차라리 한 몸인 상품이자 기술이다. 미국의 안보 질서 아래 있는 한국이 이를 거슬러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기술 독립’도 마찬가지다. 한국형 원자로는 웨스팅하우스의 전신인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으로부터 파생된 기술이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출 때도 미국 에너지부의 승인을 받은 이유다. 이후 기술 자립을 이뤄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법정에서 증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글로벌 안보 논리 안에 있는 원전 기술 문제가 ‘증명의 영역’인지도 불분명하다. 기술 독립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공허한 말이다.
선명한 강경파에 비해 현실적 타협을 고려하는 이들은 언제나 쉽게 목소리를 키우지 못한다. 원전 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합의를 이루지 않는 한 웨스팅하우스와, 그리고 미국 정부와 한국은 사사건건 부딪쳤을 게 불 보듯 뻔하다. 유럽이든 중동이든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 원전 건설을 맡길 국가는 없다.
한수원의 합의를 뜯어보면 분명 과하게 여겨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글로벌 원전의 개화(開花)를 고려할 때 그렇게 해도 충분히 얻는 게 있다는 고뇌의 결과였을 거라 생각한다. ‘매국·굴욕 합의’ 프레임은 그래서 아쉽다. 쉽게 그런 잣대를 들이대며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 미래를 위해 더 좋은 접근법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웨스팅하우스와 한수원이 합작회사를 세워 글로벌 원전 시장의 ‘팀 코러스(KORUS)’를 결성한다는 계획은 진전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원전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발작 버튼’이 돼 버린 국내 정치 상황 때문은 아니길 빈다.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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