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주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국민주’였다. 정부는 1995년 국민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보유 지분 약 21.9%를 일반 국민에게 공모했다. 청약 첫날부터 경쟁률은 1000%를 넘길 정도였다. 외환은행, 기업은행 등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달라졌다. 정부는 위기 극복을 위해 외국인 투자자가 은행 지분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외국계 자금이 대거 들어왔다. 오늘날 주요 금융지주의 주주 대부분은 외국인이다. KB금융지주는 외국인 지분율이 78%에 달한다. 신한금융(59%)과 하나금융(68%)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금까지는 국내 금융지주의 외국인 지분이 절대다수여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당이 적었고, 수익성도 낮았기 때문이다. 주가도 박스권이었다. 지배구조에 대한 신뢰도 부족했다.
최근 들어 분위기가 변했다. 고금리 환경이 길어지면서 은행들의 이자이익이 크게 늘었다. 지배구조 역시 비교적 투명해졌다. 여기에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 시행 이후 금융지주들은 경쟁적으로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다. 지난해 KB금융은 1조2000억원의 현금을 배당했다. 자사주 매입·소각까지 포함하면 총주주환원율은 39.8%에 이른다. 주가도 고공 행진이다. 하지만 외국인 지분이 워낙 많은 탓에 국내 투자자가 향유하는 과실은 그다지 크지 않다.
금융주를 ‘고배당 유출주’로 만든 데에는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도 작지 않다. 주요 금융주주의 주주 구성이 외국인에게 치우쳐 있는데도 오랜 시간 관치 금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지주의 지배구조는 휘청거렸다. 관치의 주역들은 은행의 공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정상적인 이윤 추구조차 ‘탐욕’으로 매도하곤 했다. 서민을 위해 대출금리 인하를 압박하다가도 부동산 과열 문제가 터지면 시장금리보다 대출금리를 높이라고 태도를 바꿨다. 소비자들이 책임져야 할 투자 실패도 ‘불완전 판매’ 등을 구실로 금융회사에 덤터기를 씌우기 일쑤였다. 민간 금융사 최고경영자들이 수시로 금융당국 수장 앞에 불려가 ‘말씀’을 받아적는 풍경은 이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익숙하다.
만약 금융주의 국내 투자자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더라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부 개입이 주가를 떨어뜨리거나 상승세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했다면 수많은 소액주주가 참아낼 수 있었을까. 양상은 많이 달랐을지 모른다.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업하는 은행이 정부 눈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도가 넘는 관치는 일정한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절대다수인 외국인 투자자가 그동안 항변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지켜본 건 그들이 한국 금융시장 특유의 관치 구조를 몰라서가 아니다. 은행은 투자 대상국의 핵심 인프라이자 필수재여서 외국인 투자자는 금융주를 우선 안전자산 포트폴리오에 편입한다. 그동안 답답한 주가 흐름에도 외국인은 무던하게 버텼고, 국내 투자자는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은행 수익이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국수주의적 비판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금융주를 과거와 같은 국민주로 만들 기회는 열려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코스피지수는 3000을 돌파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후 한국거래소를 찾아 “주식을 부동산에 버금가는 대체 투자 수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을 국민이 투자할 만한 매력적인 산업으로 만드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은행에 대한 지나친 질책을 삼가고 간섭이 아니라 시장 원칙에 기반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금융사 역시 ‘안방 챔피언’에 머물러선 안 된다. 코스피 시가총액 10대 기업 가운데 국내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90% 이상인 기업은 KB금융뿐이다. 국내 금융지주 가운데 해외 이익 비중이 가장 높은 신한금융조차 전체 이익의 20% 정도에 그친다. 성장에 대한 기대가 낮다 보니 금융지주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일제히 0.5배 안팎이다.
국민이 금융주에 다시 관심을 두고 투자한다면, 장기적으로 금융산업의 든든한 우군을 확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국민 주식이 되면서 대기업을 향한 일방적인 비난 여론이 줄어든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은행의 이익을 국민과 건강하게 나누는 진짜 상생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