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말로 하는 것” [횡설수설/이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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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연방의회 율리아 클뢰크너 의장(53)이 최근 연방의원 전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 사용을 “적당하고 방해되지 않는 수준으로” 자제하고, 노트북 같은 기기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스티커 부착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편지를 받아 든 의원들 사이에선 “신임 의장의 시시콜콜한 군기 잡기”라는 불만과, 토론의 장이 돼야 할 의회가 온갖 구호가 난무하는 “서커스장”이 돼가고 있어 자제가 필요하다는 옹호론이 나온다.

▷중도 보수 기독민주당 소속인 클뢰크너 의장은 올 5월 취임 이후 ‘국가 상징물 외의 다른 정치적 상징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회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규탄하는 뜻에서 ‘팔레스타인’이라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의원에게 퇴장하라 명령하고, 올 7월 베를린 퀴어축제 기간에는 관행을 깨고 의회 건물에 성소수자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못 걸게 했다. 의원들이 소셜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선동적 구호와 옷차림, 소품에만 신경 쓰면서 의회가 양극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독일 의회 규칙을 한국 국회에 적용하면 무사할 의원이 있을까 싶다. 국회만 열리면 여야 가리지 않고 ‘OUT’이나 ‘STOP’이 들어간 피켓을 회의장과 노트북 곳곳에 붙여놓고 세 과시를 한다. 국회 앞 여의도엔 20개가 넘는 피켓 인쇄소가 성업 중인데 주문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들어 24시간 영업하는 곳도 있다. 국정감사가 시작되면 “튀고 보자”는 심리에 태권도복이나 급식 조리사복을 입은 의원들과 가스통, 성인용품 ‘리얼돌’, 벵골고양이에 구렁이까지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 정도는 돼야 ‘서커스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선거운동은 시(詩)로, 국정은 산문으로’란 말이 있다. 선거 캠페인은 귀에 쏙 들어오는 선명한 구호를 쓰더라도 복잡다단한 국정을 처리할 땐 차분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회 어디에서도 깊이 있는 논쟁을 보기는 어렵다. 간단명료하고 데시벨 높은 낙인찍기와 들춰내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원들의 활약상은 맥락 없이 짧은 영상들로 편집돼 ‘의원 팩폭에 넋 나간 장관’ 같은 아전인수식 제목으로 소셜미디어에 유통된다. 뉴미디어가 정치를 죽이고 있다.

▷독일 의회 의장은 “스티커나 티셔츠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토론은 말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불완전하나 평등한 사람들끼리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지혜를 모아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다. 민주국가 국회 본회의장이 모두 고대 그리스 시대 토론 광장에 원형을 두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가장 정제된 토론 문화를 보여줘야 할 국회가 말로 토론하지 않고 소품과 구호로 싸우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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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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