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의 지형을 뒤흔드는 혁신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된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기존 비즈니스 영역을 파괴하는 혁신의 주역이 되고 있다.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MS), 엔비디아, 아마존, 애플, 오픈AI 같은 거대 기술기업들이 의료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무기 삼아 신약개발부터 환자 관리까지 헬스케어 혁신을 주도하며 전통적인 제약·바이오 업계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혁신의 포문은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가 열었다. 알파폴드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하는 AI 프로그램으로 기존의 실험방법으로는 몇 년이 걸리던 단백질 구조를 단 몇 시간만에 예측해준다. 난치성 질환 치료, 분자·세포 수준의 생물학적 과정을 밝히는 길을 열어줬다.
구글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회사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를 설립해 올해 안에 AI로 설계한 신약을 임상시험한다.
MS는 자사의 클라우드 컴퓨팅과 AI 알고리즘을 결합해 신약 개발 과정을 가속화하는 플랫폼을 내놓았다. 다양한 제약 회사들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AI 기반 신약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칩의 제왕' 엔비디아도 하드웨어를 넘어 바이오 생태계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강력한 GPU 기술을 바탕으로 단백질 서열 생성 및 결합 구조 예측 생성형 AI 플랫폼 '바이오니모(BioNeMo)'를 선보였다. 이 플랫폼으로 신약 개발 비용과 기간을 기존 대비 7분의 1 수준으로 단축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AI 신약개발 계획까지 밝혔다.
아마존도 뒤질세라 'AWS 헬스'라는 이름 아래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 임상 연구, 의료 데이터 분석을 지원한다. 생성형 AI를 통해 환자의 진료 기록을 자동화으로 작성하고 관리를 돕는 건강 관리 시스템 AWS 헬스 스크라이브(AWS Health Scribe)도 내놓았다. 온라인 약국 회사 '필팩(PillPack)'을 인수해 '아마존 약국(Amazon Pharmacy)'까지 운영하며 전방위로 헬스케어 시장을 공략 중이다.
애플은 개인 맞춤형 헬스케어 서비스를 선도하고 있다. 애플워치를 통해 심전도 측정, 심박수 모니터링 등 건강 관련 기능을 제공하며 개인 건강 관리에 앞장서고 있다. 리서치 킷(ResearchKit)과 케어킷(CareKit)같은 플랫폼으로 연구자와 의료기관의 임상시험 설계 및 환자 데이터 활용을 돕는다.
오픈AI까지 가세했다. 장수 연구 스타트업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와 협력해 일반 세포를 젊은 줄기 세포로 바꿀 수 있는 단백질 설계 모델 'GPT-4b 마이크로(Micro)'를 개발했다. 최근에는 단백질 설계 모델 연구에 집중하는 등 생성형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바이오 영역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처럼 빅테크 기업들이 의료 데이터와 클라우드 인프라, 빅데이터 분석 역량에 AI 기술력을 결합해 전례 없는 속도로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체계화하고 임상현장으로 직접 연결하는 능력은 빅테크가 가진 최대 강점이다. 이로써 전통 제약사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을 만들어냄으로써 단백질 구조 예측, 유전체 빅데이터 분석, 원격진료 플랫폼, 질병 메커니즘 연구, 개인 맞춤형 치료, 임상시험 등 파괴적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단순 서비스 확장이 아니다. 21세기 최대 격전지로 불리는 헬스케어 시장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다. 기존 제약·바이오 업계가 고수하던 방식만으로는 빅테크가 창출하는 시장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K바이오' 역시 글로벌 패러다임의 전환을 얼마나 빠르게 수용하고 적응하느냐에 미래가 달렸다. 전통 영역을 넘어서는 발상의 전환과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은수 aSSIST 석학교수·인텔리빅스 대표·CES2025 혁신상 심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