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배우·감독 의기투합…여성 연대와 해방 그린 블랙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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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1994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웠던 해로 기억된다.
폭염으로 '짜증 지수'가 높아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붙고 폭력으로 번지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민용 감독의 '개같은 날의 오후'(1995)에 당시 시대상이 잘 드러나 있다. 서민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아내를 때리는 남자를 발견한 여성 주민들이 그를 집단으로 폭행해 숨지게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평소 살림 잘하고 남편 말 잘 듣던 여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간다.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고, 내려오라는 남편들의 회유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살인적인 더위가 여자들이 참아왔던 분노 버튼을 누른 것이다.
프랑스 배우 겸 감독 노에미 메를랑이 연출하고 주연한 신작 '발코니의 여자들'에도 더위에 미쳐버린 세 여자가 나온다. 프랑스 남부 도시 마르세유의 한 아파트에 사는 니콜(산다 코드레아누 분)과 루비(수헤일라 야쿱) 그리고 둘을 만나러 파리에서 온 엘리즈(노에미 메를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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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도를 훌쩍 넘기는 폭염이 찾아와 셋은 몹시 지친 상태다. 유일한 낙은 발코니에 나가 잘생긴 이웃집 남자를 구경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남자가 셋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이들은 술 마시고 춤추며 화끈한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다음날 끔찍하게 살해당한 남자를 발견하면서 세 친구는 패닉에 빠진다. 니콜은 자기를 강간하려던 남자를 밀쳤다가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세 여자는 경찰에 자진 신고해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대신 시체를 처리하기로 한다.
평소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방법을 동원해 시신을 옮기고 유기하면서도 여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는다. 마트에서 톱과 비닐봉지를 사는 모습은 즐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살인 사건을 다루긴 했지만,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유쾌한 분위기로 작품은 블랙 코미디 성격을 띤다. 성범죄자, 가정폭력범, 이기적인 남편 등 유해한 남성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세 여자의 행동은 시원함과 해방감마저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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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을 신경 쓰느라 찌는 듯한 더위를 참고 발코니에서도 몸을 가리던 여자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옷을 하나둘 벗어 던진다. 특히 엘리즈 역의 메를랑은 한낮의 거리에서 가슴을 모두 드러내고, 산부인과 진료를 받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화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신체 부위 중 하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의 시나리오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 감독이 메를랑과 함께 썼다. 메를랑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주연을 맡으며 시아마 감독과 연을 맺었다. 여성들의 연대와 해방, 회복을 다뤘다는 점에서 '발코니의 여자들'과 비슷한 작품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제7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장르 영화를 상영하는 부문인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됐다. 영화·드라마 평가 사이트인 메타크리틱은 이 작품에 관해 "노에미 메를랑의 피 튀기는 페미니즘 호러 코미디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여성들을 풍부하게 그려냈다"고 평했다.
9일 개봉. 104분.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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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bo@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7월07일 07시00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