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한국공학한림원 소속 몇몇 공학자와 기업인들 저녁 모임에 나갔다. 당시 분위기로는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선거 얘기는 없었다. 대화 주제는 대부분 중국 제조업의 급성장과 우리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참석자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중국 산업의 자강은 현재 진형형이 아니라 과거 완료형으로 봐야 한다. 앞으로 중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올리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세탁기 하나 현지에서 제대로 팔 수가 없다. 중국 가전업체들은 소비자 가정뿐만 아니라 동네 세탁소까지 모두 IoT(사물인터넷)로 연결해 놨다.”
부동의 세계 1위 삼성전자의 D램조차 2~3년이면 따라잡힐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같은 기업들이 저가형 시장에 이미 진입한 마당이다. 이제 한국 기업들은 고사양 제품에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자 한 참석자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세계 반도체 시장은 강자가 약자들의 싹을 잔인하게 밟아온 역사다. 저가형 시장을 내주고 나면 바로 다음 시장을 내놓으라고 할 거다. 엔비디아 일감을 따고 TSMC를 추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전선에서 밀려나면 답이 없다.”
하지만 중국 반도체 회사들이 과거 일본 도시바나 독일 키몬다처럼 중간에 떨어져 나갈 것 같지도 않다. 중국은 첨단산업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특정 기업이 망하면 또 다른 기업에 자산과 기술을 넘기는 방식으로 오히려 덩치를 키운다. 중국 전기차 굴기의 주역 BYD나 CATL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연구개발(R&D) 투자에 세금 혜택을 주지만 중국은 아예 현금을 지급한다. 반도체, 배터리, 인공지능 같은 첨단분야 R&D에 평균 175%의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이 1조원을 투자하면 정부가 1조7500억원의 보조금을 주는 식이다. 화웨이는 특별대우를 받아 200%의 인센티브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 기업들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원 규모다.”
중국은 너무나 큰 나라여서 한국의 모든 인적·물적자원을 동원해도 규모의 경제를 당해낼 길이 없다. 민간 부문을 합친 중국의 연간 R&D 투자액은 줄잡아 800조원에 이른다. 대한민국 전체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중국은 거대한 창업 국가이기도 하다. 대학 졸업생의 15%가 창업을 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반면 한국의 머리 좋은 청년들은 의대 열풍에 떠밀려 다닌다. 스타트업 붐이 살아 있지만 세계적 수준의 기술 창업은 드물고 거의 내수용 사업에 머물고 있다.
“방산과 조선이 뜨고 있긴 하지만 전통 대기업들 역시 새롭고 선도적인 산업을 일구지 못하고 있다. 한때 전 세계가 추앙한 한국 재벌의 선단체제는 중국 산업의 거센 돌진 앞에서 생사 불명의 각자도생 신세로 내몰렸다. 오너들은 빅딜 같은 큰 방향의 사업 재편을 주저하고 기업 조직은 관료주의적 타성에 젖어 야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코리아 피크론’을 입에 달고 산다. 과연 출구는 없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중국을 추격하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일직선으로 달려 따라잡을 수는 없다. 10년 후를 내다보고 착실하게 준비해가는 수밖에 없다. 중국 기업들이 할 수 없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투자해야 한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어우러진 강력한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고 정부가 총력 지원을 펼쳐야 한다. 똑똑한 젊은이들이 의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이 경제와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지났다. 글로벌 경제 시스템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기술 발전은 기업인들조차 헷갈릴 정도로 빠르고 전복적이다. 하지만 산업 혁신은 정부 리더십 혁신 없이는 어렵다. ‘중국 제조 2035’처럼 국가 발전 10년 대계를 세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최고 지도자의 소임이자 책임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 10여 년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 보수, 진보 정권 가릴 것 없이 실패했다. 이제 ‘성장 제로’ 시대를 앞두고 보니 그간의 정치·이념 격돌도 모두 허업이 되고 말았다. 이재명 대통령 시대는 달라야 한다. 2030년대를 앞둔 마지막 5년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