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2억·13회차 촬영…연상호의 새로운 실험 '얼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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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9.15 17:41 수정2025.09.15 17:41

연상호 감독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연상호 감독 /사진=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연니버스'(연상호+유니버스)의 연상호 감독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천만 흥행작 '부산행'을 연출했던 그는 단 2억원의 제작비, 13회차의 초단기 촬영으로 완성한 영화 '얼굴'을 들고 관객 앞에 섰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위기감, 그리고 창작자로서의 도전 정신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얼굴'은 2018년 연상호 감독이 직접 쓰고 그린 첫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1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연 감독은 "대본을 가지고 여러 차례 투자를 받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영상화가 힘들다는 판단을 내려 결국 그래픽 노블 형태로 먼저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수년 뒤, 그는 "돈이 없어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끝에 자신의 제작사인 와우포인트를 통해 영화화했다. 결과적으로 2억원의 초저예산으로 완성된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작비 2억·13회차 촬영…연상호의 새로운 실험 '얼굴' [인터뷰+]

'얼굴'은 1970년대 고도 성장기, 사회적 성취와 성과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얼굴을 추적한다. 시각장애인임에도 시각예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임영규, 그리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아내 정영희, 그리고 40여 년 뒤 정영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들 임동환이 서사의 중심이다.

연상호 감독은 이 기획의 출발점에 대해 "성장 중심 시대를 겪어온 근현대사에 대한 우화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임영규라는 인물은 한국의 성장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다. 반면, 성취의 그림자 속에서 혐오와 차별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정영희는 그 시대가 지워버린 얼굴이다.

특히 영화는 '아름다움과 추함, 믿음과 의심'이라는 주제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보지 못하는 자가 가장 아름다운 도장을 만든다는 아이러니,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여인의 얼굴을 둘러싼 미스터리, 그리고 그 얼굴이 끝내 보여주는 진실은 연상호 감독 특유의 강렬한 문제의식을 다시금 드러낸다.

제작비 2억·13회차 촬영…연상호의 새로운 실험 '얼굴' [인터뷰+]

상업영화의 경우 일반적으로 50~80회차 이상을 촬영하지만, '얼굴'은 단 13회차, 약 3주 만에 촬영을 끝냈다.

연 감독은 "제작비에서 제일 큰 비중은 촬영 회차다. 영화 제작비는 회차와 직결돼 있다"며 "압축적이고 현실적인 회차를 통해서도 충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제작비가 줄어들었으나 스태프는 동일한 조건에서 참여했다.

현장 분위기는 오히려 활기찼다. 연 감독은 "이번에 '중독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배우들이랑 스태프들이 영화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처럼 회의해서 결론을 만들고 그런 과정이 재밌었다"고 회상했다. 큰 영화에선 맛볼 수 없는 창작의 즐거움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시도가 단순한 제작 실험이 아니라 창작자에게 닥친 위기감에서 비롯됐다고 고백했다.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어요. 저희 큰아이가 초등학생인데 유튜브를 왜 이렇게 재미있게 보는지 알겠더라고요. 제가 봤을 땐 퀄리티가 안 좋은데 아이 입장에선 전혀 중요하지 않죠. 재미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작비 2억·13회차 촬영…연상호의 새로운 실험 '얼굴' [인터뷰+]

연 감독은 "유튜브에서 첫 번째 위기감을 느꼈다"며 "영화라고 하는 것이 웰메이드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솔직 고백했다. 그는 아내와 '그것이 알고싶다'를 본 것을 언급하며 "저거 내용 '얼굴'인데 1시간 정도 되는 콘텐츠인데 충분히 재밌게 몰입해서 봤다. 영화 하는 사람들도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콘텐츠 창작자가 아닐까,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저예산 영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는 "재연드라마처럼 나오면 창피를 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창피당할 각오로 시작한 게 최초의 동기였다. 해보니 가능성이 있더라"고 말했다.

연 감독은 "투자·배급사들은 호불호를 줄이는 쪽으로 제시한다. 저는 그게 재미가 없더라. 영화는 모난 구석이 있어야 던져지는 메시지가 있다. 지금 모든 문화의 형태가 팬덤 문화로 가고 있다. 그 문화는 뾰족한 게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그는 "'얼굴' 같은 경우 배우들이 작품을 좋아하셔서 참여해줬지만, 영화가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받아야 한다. 제 생각에는 20억 정도는 되어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투배사(투자·배급사) 쪽에서도 '우리도 해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작은 영화라 해서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1970년대 성장주의 시대의 민낯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국 사회가 지워버린 한 '얼굴'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연 감독은 "만화에서 정영희를 희생자로 그렸지만, 영화에서는 주체적 인물로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 결과 영화 속 정영희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주체적 인물로 새롭게 태어났다.

제작비 2억·13회차 촬영…연상호의 새로운 실험 '얼굴' [인터뷰+]

'얼굴'은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상태다. 그는 "어제, 오늘 봤더니 현장 판매로 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저는 현장 티켓 구매는 '입소문'이 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생각한다"며 "예산이 크지 않아 BEP는 넘었으나 배우들, 스태프들에 대한 마음의 빚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어 "마음의 빚을 다 갚으려면 천만 관객은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한 관객 반응을 보며 연 감독은 "내가 생각보다 대중성이 있는 사람인가 싶더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정답이 될 수 없겠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제가 뭐라고 얘기하겠느냐마는, 어떤 방식으로든 창작을 하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영화든 아니든, 유튜브일 수도 있는 거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상호 감독은 여전히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 당일 연 감독과 류용재 작가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소설 '블랙 인페르노'(오성은)의 작품을 가져온 그는 "이런 책이라면 또 해보고 싶다. 나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책인데 내용이 칙칙하다. 제 돈으로 하지 않으면 투자받기 어렵겠다"며 웃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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