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첨단 기능을 결합한 자동차에 결함과 오작동이 발생하면,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급발진 사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자동차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고 유형도 천차만별입니다. 전기차 전환을 맞아 새로 도입되는 자동차 관련 법안도 다양합니다. 이에 IT동아는 법무법인 엘앤엘 정경일 대표변호사(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와 함께 자동차 관련 법과 판례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는 [자동차와 法] 기고를 연재합니다.
출처=엔바토엘리먼츠
자동차가 ‘바퀴 달린 고성능 컴퓨터’로 진화하며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전례 없는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오류로 인한 치명적인 사고라는 새로운 위험도 야기했습니다. 이처럼 급변하는 기술적 변화 속에서 자동차 리콜(시정조치) 제도는 소비자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법적 보루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소비자가 ‘리콜’과 ‘무상수리(서비스 캠페인)’를 혼동하지만, 법적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무상수리는 제작사의 자발적 서비스인 반면, 리콜은 법이 강제하는 의무입니다. 자동차관리법 제31조 제1항은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결함이 있을 때 제작사가 그 사실을 공개하고 시정하도록 규정합니다. 이는 공공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강행규정으로 시정 기간 보장, 개별 통지 의무 등 엄격한 법의 통제를 받습니다. 제작사가 안전과 직결된 결함(제동, 조향 등)을 ‘무상수리’로 처리하려 한다면 이는 법적 책임 회피 시도입니다.
리콜은 제작사 스스로 나서는 ‘자발적 리콜’과 정부(국토교통부) 명령에 의한 ‘강제 리콜’로 나뉩니다. 리콜 절차는 정보 수집 → 결함 조사(자동차안전연구원) → 결정 및 심의(제작 결함 심사평가위원회) → 통지 및 공표 → 실행 및 사후관리, 총 5단계로 이뤄집니다. 이 과정에서 기술적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작사의 ‘자료제출 의무’와 ‘결함 추정의 원칙’이라는 결정적인 법적 장치로 소비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합니다.
'늑장 리콜'의 무거운 대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의 도입
과거 제작사들이 결함을 인지하고도 리콜을 미루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법적 책임이 대폭 강화됐습니다.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행정적·형사적 제재 강화: 결함을 은폐·축소하거나 늑장 리콜한 경우, 해당 차종 매출액의 최대 3%까지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결함을 은폐한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형사 처벌까지 가능합니다(자동차관리법 제78조).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 강력한 변화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니다. 제작사가 결함을 알면서도(고의성) 이를 은폐하거나 늑장 리콜해 소비자의 생명, 신체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경우, 발생한 손해의 최대 5배까지 배상해야 합니다. 소송 실무에서 제작사의 ‘고의성’ 입증은 핵심 쟁점이며 ‘타임라인 증거’ 확보가 승패를 가릅니다.
최근 리콜 대상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BMS, 자율주행 알고리즘 등)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결함은 원인 규명이 복잡하므로 새로운 법적 과제를 던집니다. 예컨대 무선 업데이트(OTA) 방식의 리콜은 편리하지만, 업데이트 중 새로운 오류(벽돌 현상) 발생 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할 수 있습니다. 안전 관련 OTA는 방식만 무선일 뿐 법적 성격은 일반 리콜과 동일합니다. 이러한 분쟁에서 차량의 디지털 로그 기록(ECU 로그, 업데이트 이력 등)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므로, 소비자 역시 업데이트 완료 화면을 캡처하는 등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소비자가 놓치기 쉬운 5가지 핵심 권리
리콜 제도의 실효성은 소비자의 적극적인 권리 행사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인지하지 못해 놓치는 권리들이 여럿 있습니다. 소비자가 놓치기 쉬운 핵심 권리를 살펴봅니다.
선제적 정보 확인: 자신의 차량 관련 리콜 정보를 선제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작사의 통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자동차 리콜센터에서 차량번호나 차대번호(VIN)를 입력해 인지하지 못한 리콜 정보가 있는지 주기적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리콜 통지 무시로 인한 '과실상계'의 위험: 리콜 통지를 받고도 장기간 수리를 받지 않다가 해당 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한 경우,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비자의 '과실'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배상액 감경(과실상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리콜 통지를 받았다면 신속한 조치는 필수입니다.
리콜 전 자비 수리 비용 보상 청구권 행사: 리콜 개시일 이전 1년 이내(또는 결함조사 시작일 등 기준)에 동일한 결함을 자비로 수리했다면 그 비용을 보상받을 법적 권리가 있습니다. 수리비 영수증과 점검·정비 명세서는 결정적인 증거이므로 반드시 보관해야 합니다.
리콜과 손해배상은 별개의 법적 절차: 리콜은 결함을 시정하는 행정적 절차일 뿐, 결함으로 인해 이미 발생한 2차 피해(사고로 인한 손해, 차량 가치 하락 등)를 자동으로 보상하지 않습니다. 피해 보상을 위해서 별도의 민사소송(제조물 책임법상 손해배상 청구)을 제기해야 하며, 결함과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 입증이 필요합니다.
적극적 신고와 단계적 대응: 안전 관련 결함이 의심되면 증거를 확보해 적극적으로 신고해야 합니다. 제작사 대응 지연 시 자동차 리콜센터 민원, 1372 소비자 상담, 한국소비자원 분쟁 조정 순으로 대응해야 하며 필요 시 집단소송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결론: 안전을 위한 권리, 현명하고 적극적인 행동이 답
디지털 시대의 자동차 위험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징벌적 손해배상 등 법적 안전망은 강화됐지만, 제도의 성공은 제작사의 책임, 정부의 감독, 소비자의 적극적인 참여라는 삼박자가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리콜은 기업의 선의가 아니라 법적 의무입니다. 번호판 한 줄의 조회, 문자 한 통의 예약, 영수증 한 장의 보관이 향후 소송에서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빨리 확인하고, 빨리 고치고, 꼼꼼히 기록하라. 이 세 가지 원칙이 나와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전략입니다.
정경일 변호사는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제49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수료(제40기)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교통사고·손해배상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IT동아 김동진 기자 (kdj@i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