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지난해 글로벌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에 올라온 게임 중 유니티와 언리얼 게임 엔진을 이용해 만든 게임의 비율이다. 게임 개발 때 사용하는 엔진 시장을 두 회사가 사실상 과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한국에선 사실상 자체 게임 엔진 개발의 씨가 마른 탓에 외국산 게임 엔진 의존도는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국내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국내 대형 게임사 몇곳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게임사가 외산 엔진에 의존한다고 봐도 될 정도”라며 “엔진 개발은 비용과 리스크가 매우 크다는 인식이 강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국 게임 생태계의 외산 게임 엔진 의존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게임 엔진은 생성형 인공지능(AI) 게임, 메타버스, 실시간 시뮬레이션 등 차세대 기술 경쟁의 출발점이자 콘텐츠산업 전반의 인프라로 작동하는 핵심 기술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체 게임 엔진을 확보하려는 시도조차 드물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엔진 업체의 정책 변화가 곧바로 국내 게임사들의 생존 문제로 직결되는 불균형한 산업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엔진 개발하느니 게임 하나 더 만들어”
17일 시장조사업체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게임 엔진 시장은 올해 343억달러(약 47조3000억원)로, 2032년에는 842억달러(약 116조2000억원) 규모로 2.4배가량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생성형 AI, 메타버스 등 게임 엔진을 활용한 실시간 참여형 콘텐츠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연평균 12.1%에 달하는 고성장이 기대된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과 달리 국내 게임업계는 유독 자체 엔진 개발이 지지부진하다. 시장 규모에 비해 기술 인프라 투자가 소홀한 관행 때문이다. 국내 게임산업은 ‘빠른 개발, 빠른 출시’를 통한 수익 회수 구조에 익숙해 장기적 연구개발(R&D)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는 개발 속도와 인력 효율성, 안정성을 고려할 때 외산 엔진을 쓰는 것이 현실적으로 안전한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엔진 개발에 도전하는 순간 인력 확보는 물론이고 투자 유치, 시장 검증, 개발 일정 등 모든 리스크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실력 있는 엔진 개발 인재는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빅테크·대기업으로 이직해 게임사가 자체 엔진을 만드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게임사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대부분 스타트업도 자체 엔진 개발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한 중소 게임 스타트업 대표는 “자체 엔진 개발은 게임 한 편을 더 만드는 것과 맞먹는 비용과 시간이 든다”며 “유니티와 언리얼은 이미 산업 표준화된 툴이기 때문에 이를 굳이 대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도구를 만드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의존 구조가 결국엔 기술 종속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23년 유니티가 게임 엔진 설치 수를 기준으로 과금하는 요금제 개편안을 발표하자 전 세계 중소 게임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게임이 흥행할수록 운영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여서다. 유니티는 일부 정책을 철회했지만 이 사태는 기술 플랫폼의 규칙 변화에 얼마나 많은 게임사가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유니티뿐 아니라 언리얼 엔진을 보유한 에픽게임즈도 수수료 체계를 점차 강화하고 있다. 상업성 중심의 방향 전환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스타트업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추세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엔진이라는 외부 도구 하나가 수익 모델, 유통 전략, 제작 일정까지 좌우하는 현실 속에서 기술 플랫폼 없이 콘텐츠를 만드는 전략은 점점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전략 기술로 인식해야”
해외에서는 자체 엔진 개발에 도전장을 내미는 곳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오픈소스 기반 게임 엔진 ‘고도(Godot)’다. 상업용 엔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개발자 커뮤니티 주도로 만들어진 이 엔진은 유니티 사태 이후 급격히 사용자층이 늘어나고 있다. 게임 전문 시장조사업체 비디오게임인사이트(VGI)에 따르면 2019년 4%에 불과했던 고도의 엔진 시장 점유율은 5년 새 9%로 증가했다. 유료 수수료나 라이선스 제한이 없는 구조 덕분에 인디 개발자들과 소규모 게임사 사이에서 대안 엔진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체 엔진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국내 대표 게임사인 엔씨소프트는 과거 ‘리니지 이터널’ 등을 위해 자체 엔진을 개발했으나 최근 다시 언리얼 기반으로 돌아섰다. 넥슨, 넷마블, 크래프톤 등 대부분 주요 게임사는 유니티 혹은 언리얼을 채택하고 있고, 핵심 게임 타이틀 역시 외산 엔진에 기반해 제작하고 있다.
사실상 유일하게 자체 엔진 개발을 고수하고 있는 기업은 펄어비스뿐이다. 펄어비스는 ‘검은사막’부터 차세대 프로젝트 ‘도깨비’ ‘플랜 8’ ‘붉은 사막’까지 모두 독자 엔진으로 개발했다. 펄어비스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개발 비용이 많이 들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술 자산화와 글로벌 수출 경쟁력 측면에서 확실한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체 엔진을 보유하면 외부 정책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게임 콘셉트에 맞는 최적화된 기능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어 지식재산권(IP) 확장과 차세대 기술 대응에서도 유리하다는 평가다.
게임 엔진이 갈수록 산업 간 경계를 넘나드는 기술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게임산업의 전략적 기반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픽게임즈는 자사 언리얼 엔진을 활용해 디지털 트윈, 건축 설계, 영화 제작, 군사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 중이다. 유니티는 자율주행, 제조, 스마트팩토리, 방위산업까지 손을 뻗고 있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게임 엔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산업 전반의 기술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지금처럼 외산 엔진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선 기술 주권은 물론이고, 콘텐츠 경쟁력 자체가 취약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안정훈/최영총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