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서 중앙은행 발권력·금리 동원하려는 권력에 맞선 유구한 역사
시장·정부정책과 단절이 아니라 소통과 조화로 독립성 지켜야
(서울=연합뉴스) 김지훈 선임기자 =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첫 임기 때에 이어 이번에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빨리 내리지 않는다면서 비난하고 공격했다. 최근엔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중대 실패자'(a major loser), '(금리인하 결정이)너무 늦은 사람'(Mr.Too Late)이라고 부르며 해임할 것이라 협박하기도 했다. 연준이 금리 인하를 통해 국채금리 하락을 유도하길 바랐지만, 파월 의장이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 침체) 가능성을 의식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자 그를 향한 공격의 수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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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세정책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파월 의장 해임에 대한 우려 등으로 달러와 미국 주가가 급락하고 국채금리가 치솟는 등 미국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그를 해임할 생각은 없다"면서 한발 물러섰다. 파월 의장이 금리인하에 좀 더 적극적이길 바랄 뿐이라면서 시장의 반발을 달랬다. 상호관세 발표 후 미국 국채에 대한 매도세가 강해져 국채금리가 치솟자 이를 90일간 유예한 트럼프로서는 이른바 '채권자경단'(Bond Vigilantes)으로부터 두 번째 펀치를 얻어맞은 셈이다. 트럼프는 첫 임기 때부터 금융시장 동향에 유독 민감한 모습을 보였고 이번에도 금융시장이 그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국내외 각국 중앙은행들은 그 독립성을 훼손하는 시도에 맞서 싸운 유구한 역사가 있다. 정치권력자들은 중앙은행이 가진 금리결정권이나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을 활용해 경제적 치적을 만들어내고 싶은 유혹에 흔들린다. 하지만 경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이런 부양은 필연적으로 급격한 물가 상승 등의 많은 부작용을 초래해 경제를 더 망가뜨리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이에 맞서 싸우는 경우가 많다. 중앙은행의 최우선 소임(Mandate)이 '물가 안정'이고 중앙은행이 기본적으로 '매파 본색'(금리인상 선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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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한국은행 독립 완전쟁취를 위한 전진대회'에서 참가 조합원들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본사자료) 199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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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이 화폐를 무차별적으로 발행해 물가상승률이 200%를 돌파했던 아르헨티나, 물가 상승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직접 금리인하를 압박해 금융시장이 흔들렸던 튀르키예 등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해외뿐 아니라 한국은행도 불과 30년 전까지 정부의 압박에 대항하며 독립성 투쟁을 벌이던 역사가 있다. 총재·금통위원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구조, 정부 인사가 금융통화위원회에 참석해 발언할 수 있는 열석발언권 등이 논란이 됐었고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시도도 여러 번이다. 그나마 한은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정착된 것은 과거 길거리에 나서서 붉은띠를 매고 한은 독립 구호를 외치며 싸웠던 투쟁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느 나라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야말로 정치권력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소중한 가치도 국민, 시장과 동떨어진 단절의 독립성이라면 의미가 없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단절이나 굴복이 아니라 금융시장과의 소통, 정부정책과의 조화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총재는 정기적으로 의회에 출석해 발언해야 하고 통화신용정책보고서 등 5대 보고서를 국회에 보고해야 한다. 기준금리를 결정하고 난 뒤엔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시장에 그 이유와 전망을 설명한다. 모두 국민·시장과 소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중앙은행은 높은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마땅하지만, 동시에 금융시장과 원활한 소통으로 시장 안정에 기여하고 정부 재정정책과도 보조를 맞춰 정책 시너지를 내야 한다. 그러니 어렵고 골치가 아프더라도 한은의 금리 결정, 통화정책 뉴스를 더 관심 있게 읽고 공부하자. 그게 한은의 독립성을 더 잘 지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hoonkim@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4월23일 16시01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