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환 속도는 세계 최고다. 5G 세계 최초 상용화, 가구 인터넷 접속률 99.9%로 OECD 1위, 성인 스마트폰 사용률 98%, 비현금 결제 비율 95%. 전 국민이 디지털 네이티브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디지털 환경을 뒷받침할 국가 거버넌스는 준비돼 있을까?
현실은 기대 이하다. 국회의원 300명 중 이공계 출신은 22대 22명, 21대 29명, 20대 24명으로 역대 어느 때도 10%를 넘지 못했다. 정부 고위직 역시 이승만 정부부터 문재인 정부까지 평균 8%대, 최근 20년으로 압축해도 평균 10% 안팎에 머물렀다. 경제는 디지털로 달리는데, 거버넌스는 여전히 아날로그에 묶여 있다.
이 간극은 이미 현장에서 심각한 결과를 낳고 있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당시 'API 연동'을 중개행위로 오인해 핀테크 서비스가 멈췄다. 가상자산 과세는 추적 시스템 등 기본 인프라조차 없이 추진돼 번복을 거듭하며 정책 신뢰성마저 잃었고, NFT·메타버스는 기준 부재 속에 산업 전체가 불확실성에 시달렸다. 공공 클라우드는 보안만 강조하다 효율성을 놓쳤고, 국정감사에서는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조차 혼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는 단순한 착오가 아니다. 정책 설계자들이 기술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다.
주변국들은 어떨까? 싱가포르는 2014년 '스마트네이션 프로젝트'와 함께 정부기술청을 설립해 직원의 80% 이상을 민간 기술 전문가로 채웠다. 그 결과 UN 전자정부 평가 1위, 세계경제포럼 디지털 경쟁력 2위를 달성했다. 중국은 중앙지도부의 3분의 1 이상이 이공계 출신으로, '중국제조 2025'와 '디지털 실크로드'를 추진하며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중심에 섰다. 일본은 2021년 디지털청을 신설하며 총 직원 600명 중 200명(33%)을 민간 전문가로 채용하고 총리 직속으로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디지털 선도국인 에스토니아는 정부 내 기술 전문가 비율이 45%에 달해 'e레지던시' 제도로 10만명 이상의 디지털 시민을 확보했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디지털 시대, 기술을 아는 이들이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속담은 디지털 시대에 “알아야 국정을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단순히 이공계 출신 숫자를 늘리자는 게 아니다. 디지털 경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인력이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는 구조적 요구다. 기술을 모른 채 정책을 짜면 오류가 반복되고 규제 불확실성은 혁신을 가로막는다. 더 나아가 미래를 읽지 못하는 리더십은 국가 자원을 낭비하고 국익을 희생시킨다.
변화는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국회 내 이공계 비율을 높이고, 부처별 기술 전문가를 배치하며, 상임위마다 '기술 전문 보좌관제'를 도입해야 한다. 공무원 디지털 역량 교육을 의무화하고, 디지털 거버넌스를 전담할 부처를 신설해야 한다. 산업계·학계·정부가 함께하는 신산업 상시 협의체도 필수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산업화의 기적을 이룬 선수들은 이제 시대의 끝자락에 서 있다. 기술 변화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데, 우리의 거버넌스는 여전히 선형적으로 움직인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정책과 현실의 괴리는 깊어지고, 국가는 미래 경쟁에서 멀어진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5년 후엔 되돌릴 수 없다. 디지털 거버넌스 없이는 진정한 디지털 강국이 될 수 없다. 역사는 있었지만 미래는 없는 나라가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선수교체의 시간이다. 넥스트 거버넌스 없이는 넥스트 코리아도 없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