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1919년1월28일 화요일 저녁입니다. 독일 뮌헨 슈타이니케 예술홀에서 대학생 단체 초청으로 막스 베버의 강연이 열립니다. 독일은 제국에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바뀌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치른 직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습니다. 승전국들 배상에 국민소득 10%를 써야 합니다. 빵 1파운드(0.45kg) 값이 30억 마르크라는 기괴한 일이 뒷날 닥칩니다. 빵 사러 가는 그사이, 가격이 또 올라 지폐를 한 수레 더 끌고 가야 할 판입니다. 전무후무한 초인플레이션으로 역사는 기록합니다. 좌파 봉기는 유혈 진압되고 총격이 난무한 가운데 정파들이 우후죽순 난립합니다. 피눈물 나는 혼돈의 시기에 현실 참여 성향이 강한 학생들은 학자의 고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기대에 부풀어 베버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베버가 말문을 엽니다. [(이하 건너뜀 많은 요약) 내 강연은 여러모로 여러분을 실망시킬 겁니다. 현안들에 대해 어떤 입장 표명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겠으나 마지막에 아주 형식적으로만 언급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강연에서 나는 어떤 정책을 실천해야 하는지, 그것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도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정치를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혹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와 같은 보편적 주제와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취지를 밝히며 시작한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 『Politik als Beruf』(소명으로서의 정치)입니다. 명사 베루프(Beruf)에 든 ruf의 근원, 루펜(rufen)은 부른다(召. 부를 소)는 뜻입니다. 베루프는 영어 보케이션(vocation)과 비슷합니다. 직업(job, profession)보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제목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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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강연 들머리에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긋고 있네요. 벌써부터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겠지요? 책은 직업정치인과 정치연구자들의 필독서가 되어 두고두고 읽힙니다. 당시 학생들은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후학들은 달랐습니다. 책은 무엇보다 본질을 꿰뚫는 개념 정의로 위력을 뽐냅니다.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한 유일한 인간공동체가 국가라고 말합니다. 열정과 균형적 현실 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 정치이고요. 직업정치인은 냄비 끓듯 뜨겁기만 하고 뭘 이루긴 어려운 주관적 정념의 반대 격인 객관적 열정, 책임감, 거리를 둔 채 상황을 보면서 균형 있게 판단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변증법은 화룡점정입니다. 신념이 응당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신념에 따른 행위가 불러올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는 정치가 필수적이라고 조언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가진 것 없이 권력욕만 한가득한 정치인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그 끝을 보기까지 국민이 너무 큰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고요.
시는 끝났고 산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베버는 강연을 맺으며 독일의 앞날이 우울할 거로 봅니다. 그러나 한 세기 뒤 여기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희망 담론이 영감을 줍니다. 자칫 길고 지루하기 쉬운 산문을 잘 읽어내라는 듯 베버는 강조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으리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중략)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의에서 베버는 친애하는 청중이라고 학생들을 부르며 "10년 뒤에 이 문제에 대해 우리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고 했던 대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강연 이듬해에 유명을 달리합니다. 하지만 베버는 계속 읽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Max Weber, 『Politik als Beruf』, Anaconda, 2014
2. 막스 베버 저 최장집 해제 박상훈 역, 『소명으로서의 정치』, 후마니타스, 2021
3. KDI 경제교육ㆍ정보센터 클릭경제교육(종간)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이 독일에 남긴 것'(박복영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2014.07.01 -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512&cidx=2204
4.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4월05일 09시09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