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100대 벤처투자자 중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각 한 명씩 배출한 우루과이와 아랍에미리트(UAE)에도 밀렸다. 그동안 ‘내수 유니콘’ 배출에만 집착해온 국내 벤처캐피털(VC)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초대형 VC가 주도하는 글로벌 혁신 생태계에서 소외돼 있다 보니 기술력을 갖춘 한국의 유망 스타트업조차 해외로 날아가 글로벌 VC 자금을 받는 추세다.
◇ 한국 스타 투자자 ‘제로’
2일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가 발표한 ‘미다스 리스트 2025’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톱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선정된 100명 중 74명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분석됐다. 활동지역 기준 중국 14명, 영국 6명, 이스라엘 2명 순이다. 100명 중 한국에서 활동하는 투자자는 한 명도 없다. 독일, 우루과이, UAE에서도 한 명씩 나온 것과 대조적이다.
미다스 리스트는 글로벌 VC업계에서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벤처투자자 명단이다. 최근 5년간 회수 실적과 업계 평판, 투자 다양성 등을 기준으로 순위를 정한다. 국적별로 분석해도 한국인 투자자는 없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베네수엘라 국적의 투자자가 50위 안에 이름을 올린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 테크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VC판에 영향을 주는 한국계 빅샷이 없다”며 “실리콘밸리에선 국적별로 서로 끌어주는데 한국 투자자의 입김은 미미한 수준”이라고 했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스타 투자자는 주로 오픈AI(앨프리드 린), 에어비앤비(리드 호프먼), 팰런티어(피터 틸) 등 굵직한 글로벌 기업에 초기 투자로 들어갔다. 중국에서도 바이트댄스, 디디추싱 등 대형 기업이 나왔고, 이를 통해 중국 투자자들이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한국 유니콘은 대부분 내수 기업이다. 이들 기업에 투자한 국내 투자자도 글로벌무대에선 무명에 가깝다.
국내 유니콘 중 글로벌 인지도가 가장 높은 쿠팡 역시 한국 VC가 아니라 미국 VC로부터 초기 투자를 받았다. 이날 공개된 리스트에도 쿠팡에 투자해 상장 후 잭팟을 터뜨린 미국 그린옥스캐피털의 닐 메타만 이름을 올렸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에서 엑시트 경험이 있는 김범석 의장은 굳이 까다로운 한국 VC 자금을 받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 “투자금 규모가 달라”
한국 VC들이 실리콘밸리 기업에 투자하려고 해도 들어갈 수 있는 자금 규모가 다른 데다 투자 문화도 차이가 크다. 그러다 보니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글로벌 시장을 노리는 스타트업은 한국 VC의 투자를 받는 대신 본사를 옮겨 해외 VC의 투자 유치를 타진하고 있다.
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창업자는 “프리A 투자를 받을 때 스무 곳이 넘는 국내 VC를 만났는데 기술을 정확히 이해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며 “해외에 나가서 같은 얘기를 했더니 오히려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AI 스타트업 대표는 “활용할 수 있는 투자금 규모가 달라 처음부터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국내 VC들의 정책자금 의존도가 높아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안정적인 회수에만 집중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벤처펀드 출자액 중 정책자금인 모태펀드 비중은 23%에 달한다.
미국에선 피터 틸처럼 성공적인 창업 경험이 있는 기업인이 전문 투자자로 변신하는 일이 흔한 데 비해 한국의 창업자들 대부분이 한번 성공하고 나면 창업 생태계에서 빠져나가는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