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서영아]맨주먹 베이비붐 세대들의 근사한 황혼

1 month ago 3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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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본보 ‘100세 카페’ 지면에 등장한 지형운 씨는 국가정보원을 퇴직한 뒤 잠시 쉬러 간 고향 강원도 철원에 아예 정착해 농부가 됐다. 보람 있게 일하며 용돈도 벌고 지방소멸도 늦출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 박병하 전 보건복지부 국장이 ‘100세 카페에 어울릴 사람’이라며 추천 이메일을 보내 주셨다.

기사가 나간 날 인천에서 택시를 운행하는 전직 교장 정정호 씨가 “내 중학교 동기동창”이라며 반가움을 전해 왔다. 정 씨는 2023년 12월 100세 카페에 등장한 인연이 있다. 교직에 종사하며 인천에 정착했지만 고향은 철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1·4 후퇴 때 월남했던 그의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며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철원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 뒤 무정한 세월만 흘렀을 것이다.

먹고사는 게 큰일이던 시절

각기 1957년생, 1956년생인 두 사람은 먹고사는 게 큰일이던 시대 배경에 더해 지정학상으로도 변방인 고향에서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렸다. 소년 시절 당연하다는 듯이 공장에 취직했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뒤늦게 학업을 이어 갔다. 인터뷰를 하며 기자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적절한 시기에 주어져야 했을 정보의 부족이었다. 삶을 조금이나마 더 유리하게 꾸려 나갈 정보랄까 요령을 알려 주는 존재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 부딪쳐 시행착오를 거치며 더듬더듬 길을 찾았다.

지 씨는 농고를 졸업한 뒤 경기도의 한 자동차 공장에 입사했지만 고졸과 대졸의 엄청난 대우 차이를 알고는 사표를 냈다. 정 씨는 중학교 졸업 뒤 동생과 서울로 상경해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3년간 일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학비가 없으면 진학을 포기하던 시절이었다. 다른 가족의 희생이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지 씨는 결혼한 누나의 서울 집에서 학원비를 지원받으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정 씨는 동기보다 4년 늦게 고교생이 됐고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그의 두 동생은 계속 공장에서 일하며 가계를 도왔다.

12일자 100세 카페 주인공인 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은 1955년생으로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이다. 홀어머니가 흑산도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해 뭍으로 유학 보냈다. 목포상고 졸업 뒤 혼자 상경해 공장과 백화점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주경야독으로 세무사 시험에 붙어 일가를 이뤘다. 힘닿는 대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박 회장은 은퇴를 앞두고 35년간 키워 온 법인을 동고동락해 온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고민 중이다. 목표는 4년 뒤. 법인을 넘겨준 뒤에도 자원봉사 형태로 계속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이웃을 생각하는 선한 마음

1차 베이비붐 세대는 1955∼1963년생으로 현재 62세부터 70세다. 산업화 세대 끄트머리, 386 세대 앞머리를 차지한다. 대부분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했지만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청춘들이다. 각자의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고 나름 성취를 이뤄낸 그들의 인생 후반전은 멋지고 훈훈하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작은 힘이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선한 마음도 가득하다.

“나쁜 짓 할 거면 공부는 해서 뭐하냐.” 고등학생 시절 박 회장이 어머니께 혼날 때 들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품을 판 돈으로 애써 아들을 학교에 보낸 어머니의 신념은 ‘공부를 많이 하면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같은 베이비붐 세대지만 요즘 미디어에서 많이 보는 모습은 나라와 공동체는 망가지건 말건 본인의 기득권 유지 혹은 확대에만 골몰하는 엘리트들 모습이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일상을 쌓아 나가는 100세 카페 주인공들 삶의 자세가 더욱 값져 보인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이가 많아져야 세상이 살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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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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