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혼의 심연에 닿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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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영화 '산딸기'(1957)는 50년간 의사로 활동한 노 교수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거의 폐허가 된 옛 고향 집 앞에 서자 그의 전면에는 젊은 시절 겪었던 장면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그는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한때 부인이 될 뻔했던 사촌 사라를 만난다.
'산딸기'는 스웨덴의 거장 감독 잉마르 베리만(1918~2007)이 절정의 기량에 올랐을 때 찍었던 대표작 중 하나다. 죽음을 앞둔 노 교수가 인생을 더듬으며 그가 겪었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고, 회한을 곱씹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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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뛰어난 예술가는 무당처럼 앞일을 내다볼 수 있다고 했던가.
마흔을 앞둔 베리만이 노 교수의 인생을 상상하며 만든 '산딸기'는 베리만의 노년을 암시하는 일종의 전주곡과도 같은 작품일지도 모른다. 베리만이 노년에 쓴 자서전 '환등기'를 읽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책은 유년 시절의 꿈부터 말년의 곤욕까지 베리만의 삶을 따라간다. 탁월한 영화·연극연출자이자 각본가인 그는 안일하게 시간순으로 책을 구성하진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넘나들고, 사건과 사건이 교차하는 그의 영화처럼, 책의 플롯은 교묘하게 직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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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연합뉴스]
부유한 목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양친의 불화, 쉽게 매를 들었던 엄한 아버지, 늘 우울했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벌였던 형과의 갈등을 겪으며 자랐다. 부모는 자주 싸웠고, 엄마는 사랑을 찾았지만, 아이들이 어려 결국 남편을 떠나지 못했다. 어수선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의 꿈을 지켜준 건 영화였다.
어린 베리만은 설탕 상자 위에 시네마토그래프를 올려놓고는 등유 램프를 켜고 하얀 벽에 빛을 쏜 후 필름을 걸었다. 그리고 나면 세상은 조용하고 평안해졌다. 할머니와 함께 매주 영화를 보고, 삼촌이 만들어준 시네마토그래프와 환등기(그림, 사진 등에 투사하고 반사되는 빛을 렌즈로 확대하여 영사하는 장치)를 만지작거리면서 영화를 향한 그의 열정은 갈수록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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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만은 커서 결국 위대한 영화감독이 됐다. 대본을 직접 썼고, 꼼꼼하게 현장을 관리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에게 즉흥적인 것은 "낯선 일"이었다. 모든 것을 사전에 계획하는 완벽주의자. "편집은 촬영하는 순간에 이루어지고 리듬은 대본에서 만들어진다"는 게 그의 모토였다.
촬영 현장에선 그저 마법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완벽한 준비 속에 잉태된 우연 같은 것들 말이다. 몇 달에 걸쳐 지겨울 만큼 흐트러짐 없이 매진했던 일이 불과 몇 초 사이에 포착되는 마법.
"연습하지 않은 표정이 찰나에 탄생하고 카메라는 그걸 포착한다…이전에 본 적이 없던, 결코 파악되지 않은 그 고통은 몇 초 머물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필름 조각 속에 그 순간이 담겼다. 어쩌면 나는 그 찰나를 기다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진주조개를 캐는 어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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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연합뉴스]
여러 차례의 이혼, 탈세 의혹, 전쟁 같은 촬영 현장, 암에 전이된 잉그리드 버그만과 '가을 소나타'를 찍으며 그녀에게 따귀를 맞은 일, 그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무방한 배우 리브 울만과의 사랑, 영화를 찍고 싶지만 나이 듦에 따라 성욕처럼 말라가는 창의력에 대한 아쉬움, 모든 예술 활동이 결국 "헛수고"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 삶의 다리를 건너가며 겪은 수많은 좌절과 실패,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승리의 기록이 책에 담겼다.
그런 수많은 사건을 지나 책을 관통하는 정서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다. 베리만이 상찬한 타르코프스키, 페데리코 펠리니, 구로사와 아키라, 루이스 부뉴엘과 마찬가지로 그는 '영화라는 꿈'에 빠져 허우적댔고, 거기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가 기록이 아니라면 그것은 꿈이다… 영화라는 꿈, 영화라는 음악. 어떤 예술 형식도 영화만큼 우리 일상의 의식을 뛰어넘고, 우리의 감정을 향해 돌진하고, 영혼이 어둑어둑해지는 방 깊숙이까지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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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2001년 도서출판 '이론과 실천'이 '마법의 등'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절판된 책이다. 24년 만에 민음사가 '환등기'란 제목으로 선보였다. 이번엔 스웨덴어판 정본을 번역했다.
신견식 옮김. 380쪽.
buff27@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5월30일 13시49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