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연구소장 민태기 박사
[아이티비즈 박시현 기자] S&H연구소장 민태기 박사가 3일, 215회 영림원CEO포럼에서 ‘2025 노벨경제학상이 한국 산업에 주는 교훈’을 주제로 강연했다.
유체역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민태기 박사는 이번 강연에서 “제조현장의 처방적 지식과 학계의 명제적 지식의 결합이 증기 기관으로 대표되는 산업 혁명을 만들었다”며, “여전히 제조현장과 엔지니어를 외면하는 우리나라의 풍토는 산업의 미래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스티브 잡스의 ‘리버럴아츠’를 인문학으로, 다이슨 제품 설계를 디자인으로 오해한 결과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살펴보고, 우리 일상에서의 다양한 창조적 혁신 사례를 바탕으로 기성세대가 가져야할 문제의식을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짚었다.
민태기 박사가 연구소장으로 있는 S&H는 초소형 터보제트엔진을 개발 및 생산하는 기업으로 한국형 우주발사체 누리호 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다음은 강연 내용.
◆ 리버럴 아츠와 엔지니어에 대한 오해의 결과
먼저 우리 사회에서 오해하고 있는 몇 가지 언어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역사상 인문학이 가장 흥했던 시기는 2011년이다.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했고 기업은 인문학자를 초청해 특강을 하는 등 인문학 인재를 키워내려고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이런 인문학 열풍의 배경에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있었다. 2011년 3월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 2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애플은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교차점에 있다”며,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강조했다. 이 발언은 국내에서 크게 화제가 됐고 인문학이 필수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언론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말한 리버럴 아츠를 모두 인문학이라고 해석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리버럴 아츠가 진짜 인문학일까? 리버럴 아츠는 중세 대학에서 필수 교양으로 가르치던 7가지 과목 즉 '자유7과'를 말한다. 이 과목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다. 이게 어떻게 인문학인가? 대학이 원한 것은 문·이과 통합형에다 예체능까지 겸비한 르네상스형 인재였다.
당시에 생각했던 리버럴 아츠의 예를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16세기초 르네상스 화가였던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가득 찬 방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그림이 ‘아테네 학당’이다. 라파엘로는 자기보다 2천 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로마의 고대 철학자, 수학자, 과학자, 사상가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겼다. 내가 관심있는 사람은 제일 구석에 있는 피타고라스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타고라스가 보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의 제일 위에 6, 8, 9, 12라는 로마 숫자와 도식이 그려져 있다. 이 숫자들을 전개하면 진동수비 1:2, 2:3, 3:4가 만들어진다. 이 비율로 악기를 조율하면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피타고라스 음률이라고 한다. 화가 라파엘로는 음악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수학자 피타고라스를 바티칸 박물관에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 예술의 경계를 넘는 것, 이것이 바로 리버럴 아츠다.
2025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업적과 관련해 ‘파괴적 혁신’을 얘기해보겠다. 파괴적인 혁신은 거의 다 노동 생산성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석기 시대가 왜 청동기 시대가 됐을까? 석기 부족과 청동기 부족이 전쟁을 한다고 했을 때 첫째 날 전투에서 두 부족이 전부 무기를 다 소진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다음날 재전투를 위해 석기 부족은 돌을 갈아야 한다. 반면 청동기 부족은 거푸집에다 청동 용액을 부어 밤새 천 개, 만 개의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공존할 수 없는 기술 이게 바로 파괴적 혁신이다. 그래서 파괴적 혁신을 얘기할 때 노동 생산성은 매우 중요하다.
인터넷에서 노동 생산성 순위를 검색하면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오는데 착시다. 한국의 제조업 노동생산성은 세계 탑이다. 우리나라는 제조업의 로봇 도입률이 매우 높다. 중소기업들도 로봇 자동화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 생산성이 낮은 것은 자영업 비중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 처방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이 결합한 독특한 문화가 산업 혁명 탄생
2025년 노벨 경제학상은 기술 혁신과 경제 성장을 규명한 조엘 모키어, 필립 아기옹, 피터 하윗 세 명이 공동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 세 명의 업적에 대해 “혁신이 계속되려면, 무언가가 작동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왜 그런지 과학적 설명도 필요하다. 산업 혁명 이전에는 이게 부족해서 발견과 발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라고 설명했다.
이 세 명의 공동 수상자는 연구 기여도에 따라 상금을 나누어 받았는데 조엘 모키어 50%, 필립 아기옹 25%, 피터 하윗 25%였다. 가장 기여도가 높았던 조엘 모키어는 <성장의 문화>라는 저서에서 역사적 관찰을 통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어떻게 서구에서 가능했는지, 왜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처방적 지식(prescriptive knowledge)’이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과 결합하는 독특한 문화가 산업혁명을 탄생시켰다고 설명하며, 그 시작점을 증기기관의 탄생으로 보고 있다.
예전의 과학 이를테면 이집트 피라미드, 우리나라 에밀레종,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은 왜 전승이 안 됐을까? 어떠한 기술 장인들이 창조적인 발견을 했지만 학자들이 과학적 설명을 붙여서 책으로 만들지 않으면 즉 그 논리를 만들지 않고서는 전승이 안 된다.
노하우가 중요한 기술 장인들의 지식이 처방적 지식이라면 책으로 기술되는 지식은 명제적 지식이다. 노하우는 단절될 수 있지만 책으로 기술되는 명제적 지식은 전승된다. 만약 피라미드를 건축하는 기술이 명제적 지식과 결합했다면 이미 몇천 년 전에 지금 두바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올렸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고려청자 만드는 기술을 전승했다면 서양을 능가하는 세라믹 기술을 발전시켰을 것이며, 에밀레종을 만드는 기술을 이어갔다면 세계 최고의 주조 기술을 가졌을 것이다.
조엘 모키어의 <성장의 문화>에 따르면 뉴턴이 활동했던 시대만 해도 다른 나라와 비슷했던 영국의 GDP는 증기 기관이 탄생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바로 증기 기관은 명제적 지식과 처방적 지식의 성공적인 결합을 보여주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성장의 문화>에서는 증기 기관이 탄생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길게 얘기한다.
◆ 1776년 세가지 사건: 국부론 출판, 증기 기관 제작, 미국 독립 선언서 발표
1776년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하고,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제작하고, 벤저민 프랭클린이 미국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해다. 놀랍게도 이 세 가지 사건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먼저 1750년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 있는 글래스고라는 도시로 가보자. 제임스 와트는 능력 있는 기계공이었지만 장사에는 재능이 없었다. 당시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교의 도덕 철학 교수였는데 길을 가다 제임스 와트를 발견하고, 글래스고 대학교에 들어와 교수들의 실험 실습 기자재를 손봐줄 것을 요청했다. 제임스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연구 장비로 들여온 ‘뉴커먼 증기 기관’의 수리를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증기 기관을 접했다. 이때가 1763년이었다. 뉴커먼 증기 기관은 1712년 영국의 발명가 토머스 뉴커먼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이었다. 그런데 뉴커먼 증기 기관에는 상변화로 인한 열 손실 문제가 있었다. 앞에서 말한 처방적 지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제임스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조지프 블랙 교수를 통해 ‘잠열’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와트는 기존 증기 기관에서 발견된 문제 해결 뿐만 아니라 차후 본인의 증기 기관의 제조 과정에서도 당대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듯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발명 사례를 보면 명제적 지식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763년 애덤 스미스에게 영국의 재무장관인 타운센드가 찾아온다. 당시에 영국의 귀족들은 자기 아들을 명망가 있는 교수에게 맡겨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며 유적들을 탐사하는 ‘그랜드 투어’라는 관습이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타운센드의 아들과 여행을 하면서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게 되고, 재화는 쌓아두는 게 아니고 돌리는 게 훨씬 이익이라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의사였던 프랑수와 케네와의 만남으로 자유방임 시장 경제의 원리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애덤 스미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10년간 저술한 책이 <국부론>이다.
애덤 스미스가 타운센드의 아들과 여행 중에 프랑스 파리에 갔는데 벤자민 프랭클린이 찾아와 여러 경제 현안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때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는데 식민지 미국의 대표가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영국이 매기는 과도한 세금 이른바 ‘타운센드법’의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프랑스 계몽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뉴턴 물리학에 치중했는데 뉴턴의 물리학은 존 로크의 사회 계약설 등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핵심 토대가 됐다. 이런 경험을 통해 벤자민 프랭클린은 미국에 가서 독립 선언서를 기초하게 되는데 첫 문장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이다. 미국은 수천 년의 인류사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명제를 정립한 최초의 나라가 됐다.
1776년에 발생한 이 세 사건으로 서양에서 자본주의 혁명, 산업 혁명 그리고 정치 혁명이 시작됐다. 여기서 증기 기관이 중요하다. 기술 장인을 발탁한 사람이 누구이며, 그 기술을 설명해 주는 사람은 누군가? 바로 대학 교수이다. 처방적 지식(제조현장)과 명제적 지식(학계)의 결합, 그리고 이를 문화로 만든 일군의 ‘문화적 사업가’들이 산업 혁명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여전히 제조현장과 엔지니어를 외면하는 풍토는 우리 산업의 미래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례로 2025년 11월에 중국은 물없는 고비사막에 건설한 토륨 용융염 원자로에서 세계 최초로 토륨을 우라늄 핵연료로 바꾸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10대 일간지는 전부 용융염 원자로를 소금 원자로로 보도했다. 그런데 여기서 염은 소금이 아니다. 토륨 용융염은 방사능 물질이다.
◆ 디자인은 예쁜 외관이 아닌 ‘설계’
다시 리버럴 아츠로 돌아가보자. 국내 대학의 어느 교수는 애플이 디자인 기업으로 전락했다고 했는데, 리버럴 아츠에 대한 오해가 애플 제품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 것이다. 대개 디자인을 맵시가 예쁜 외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래 의미는 설계이다. 디자인은 제품을 만드는 부품 설계와 공정 설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애플은 모든 신제품 발표회에서 해당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제조 공정을 공개할 때가 많다. 애플의 아이패드에서 제일 비싼 부품은 디스플레이도, 리튬 이온 배터리도, CPU도 아닌 금속 껍데기다. 이것을 만든 사람이 애플 수석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였다. 우리는 보통 디자이너 하면 멋있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연상한다. 그런데 조너선 아이브의 모습을 보면 공장 노동자같은 복장이며, 작업실에는 절삭 가공용 공작기계 CNC 머신이 있다. 조너선 아이브는 영국의 디자인 스쿨 출신인데 제조 공장처럼 꾸민 작업실에서 CNC 머신으로 제품을 설계했다.
우리나라 제품 디자이너 중에 이처럼 스스로 CNC 머신으로 금속을 깎아가면서 제품을 만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삼성이나 LG의 제품 디자인실을 다 가봤는데 그림만 그릴 뿐 제조 공정에는 관심이 없다.
애플의 디자인 스쿨에서는 금형 파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출 조립까지 가르친다. 조너선 아이브와 같은 디자인 스쿨 출신이었던 제임스 다이슨의 다이슨에서는 입사를 하면 누구든지 제품의 분해, 조립부터 시킨다. 그래서 국내 대기업의 어떤 디자이너가 회사에 CNC 머신을 사달라고 건의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CNC 머신의 가격이 비싸고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애플의 이같은 디자인 철학은 제품 원가에 직결된다. 정밀 통가공으로 부품 수를 줄이고, 줄어든 부품 수는 조립 공정의 축소로 이어지며, 조립 공정의 축소는 생산 원가에 반영된다. 2007년 애플의 아이폰이 출시된 이후 18년 동안 애플의 시장 점유율은 수량 기준으로 약 15% 정도를 항상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영업이익의 점유율은 80%가 넘는다.
민간 우주항공 기업인 스페이스X는 미국 내에서 원재료 조달부터 부품 생산, 최종 조립 및 발사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는데 1단 로켓과 엔진을 회수해 재사용함으로써 로켓 발사 비용이 우주 개발 기술의 강국인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훨씬 싸다. 스페이스X의 재사용 가능한 로켓 엔진인 랩터는 지속적으로 부품수를 줄여 그 모습이 지금은 매우 단순화됐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2024년 스페이스X의 대형 우주선 '스타십‘이 로봇팔을 이용해 로켓 추진체인 슈퍼 헤비를 공중에서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세상이 놀랐다. 국내의 어느 신문 사설에서는 “대학의 교육 혁신은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유명 대학의 상당수는 전기차 시대에 아직도 내연기관 위주로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코미디다. 인류가 가진 모든 발사체 엔진은 내연 기관이다. 스페이스X 엔진은 전부 내연 기관이며 아르테미스도 내연 기관이다.
골프 대회인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산화한 가스터빈 블레이드를 형상화해 디자인됐다. 두산그룹이 명운을 걸고 개발한 이 가스터빈 블레이드는 극도로 높은 온도와 회전 압력을 견디도록 설계된 첨단 기계 부품이다. 두산은 국산화해 성공한 가스터빈을 2025년 10월 미국 빅테크 기업에 공급하는 계약을 맺으며 해외 첫 수출 성과를 이뤄냈다. 이처럼 산업 현장은 매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 창조적 혁신 사례: 나이키, 에펠탑, 다이슨
상식을 뒤엎는 창조적 혁신의 사례를 살펴보자. 먼저 나이키 창업자 빌 바우먼이다. 빌 바우먼은 미 오리건대 교수로 육상 코치였는데 더 가볍고 성능 좋은 운동화를 연구하다가 아식스의 운동화 대리점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아식스 운동화는 철제 스파이크를 박았는데 선수들끼리 부딪히면 부상이 심했다. 빌 바우먼은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아내가 아침 식사로 와플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 운동화 밑창을 개발했다. 이 운동화를 신은 선수들의 기록은 당연히 좋아졌다. 이것을 계기로 나이키를 창업했다. 아내는 와플 기계를 버렸는데 나중에 발견해 지금은 나이키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나이키 농구화 브랜드는 조던인데 육상화 브랜드는 와플이다.
다음은 에펠탑 얘기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한 변의 길이가 125m인 정사각형 위에 높이 324m로 세워진 거대한 건축이다. 무게는 7700t으로 에펠탑 크기의 원통을 채운 공기 무게 9540t보다 가볍다. 이처럼 에펠탑이 큰 규모에 비해 무게를 대폭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인체의 뼈 구조를 참고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인체의 골격을 모방했다. 그 시작은 공대 교수가 우연히 방문한 의대 해부학 교실에서였다. 인체의 뼈 구조는 대개 외곽이 치밀하고, 중심은 성글다. 그 교수는 인체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받는 넓적다리를 분석했다. 놀랍게도 밀고 당기는 힘이 반복되며 가해지는 하중들은 연약한 뼈의 중심부를 피해 단단한 외곽부로 분산되고 있었다. 해면골이라 불리는 중심부의 엉성해 보이는 조직이 이 분산을 담당한 것이다. 이렇게 외부와 내부로 강약이 구분되면, 뼈 전체가 튼튼할 필요가 없어 무게도 줄이고 하중도 잘 버틸 수 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바깥쪽은 튼튼하게 하고 안쪽은 거의 철사처럼 만든 것이 에펠탑이다. 이것도 처방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이 결합한 것이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다이슨의 디자인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임스 다이슨이 청소기 시장에 혁신을 가져온 것 중 하나는 3차원 원심 임펠러이다. 원심 임펠러는 공기를 잘 압축하므로, 이를 반대로 작동시키면 공기를 잘 빨아들인다. 기존에는 단순한 2차원 임펠러를 사용해 효율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슨은 우주항공에서나 사용되던 3차원 원심 임펠러를 과감히 도입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곧 후발 주자들이 이를 따라갔다. 그러자 다이슨은 한발 더 나아간다.
원심 임펠러는 공기를 잘 압축하지만, 유량을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유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축류 임펠러이다. 다이슨은 터보제트 엔진에 사용하는 고성능 축류 임펠러를 헤어드라이어에 장착했다. 그리고 단숨에 세계 시장을 휩쓴다. 또 후발 주자들은 이를 따라갔다. 그럴수록 다이슨은 더 앞서간다. 이번에는 항공 엔지니어 헨리 코안다가 발견한 코안다 효과를 이용한 제품을 출시한다. 모발 손상 없이 머리를 가꿀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코안다 효과는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누구도 이를 헤어 스타일링에 쓸 생각을 못했다. 주목할 점은 이 제품들의 중심이 되는 초고속 회전 모터를 단일한 크기로 디자인했다는 사실이다. 다이슨의 경쟁력은 이렇게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 “엔지니어는 크리에이터”
이것들이 영국에서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1851년 만국박람회를 열었다. 이 박람회의 성공을 토대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 공의 주도로 사우스 켄싱턴 지역에 알베르토폴리스라는 문화·과학·교육 지구를 조성했다. 여기에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과학 박물관, 로열 앨버트 홀 등 주요 문화 기관, 그리고 왕립예술학교와 임페리얼 칼리지 등 교육 기관이 밀집해 있다.
조너선 아이브와 제임스 다이슨은 모두 공대가 아니라 디자인 학교 출신이다. 그들이 공학적 원리를 디자인에 도입한 것은 경계를 넘는 폭넓은 시야에서 가능했다. 제임스 다이슨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모교였던 왕립예술학교 학장을 맡았고, 후임 학장은 조너선 아이브였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디자인 스쿨에서 엔지니어링 지식을 얻게 됐을까? 영국의 이공계 중심 대학인 임페리얼 칼리지 디자인 스쿨에서는 그림 그리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도금 열처리 등 생산 공정을 가르친다. 여기에 입학하려면 이공계 전문 지식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며 미분 방정식도 풀어야 한다.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들어가면 1층 전체가 증기 기관이고 그걸 만들어낸 공작 기계, 보링 머신들이 있다. 이것들이 바로 명제적 지식과 처방적 지식을 말했던 조엘 모키어가 전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이다.
나는 2026년 2월 23일 UNIST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면서 아주 짧은 실험 영상을 보여줬다. ’콜럼부스의 달걀‘이었다. 달걀 10구를 사다가 사무실 책상 위에 세워보았는데 잘 세워졌다. 축사에서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는 포기하지 말고 해보라는 것이었다. 남이야 뭐라든 제 갈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소비되는 달걀은 180억 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세워볼 만하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은 선입견을 갖고 그냥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엔진을 만드는 사람이다. 엔진은 연기를 내뿜는 내연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을 뜻하는 ’인제니움(Ingenium)‘이 어원이다.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찰스 배비지가 제시한 초기 컴퓨터에 엔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엔지니어는 크리에이터로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은 늘 경계 너머에 있기에 엔지니어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와 제임스 다이슨은 엔지니어였다. 하지만 우리 대학은 생산 현장과 거리를 두고, 공대 출신조차 엔지니어라 불리기를 꺼린다. 엔지니어라는 언어에 대한 오독이 있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던 리버럴 아츠나 엔지니어에 대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불확실한 대외 여건으로 우리 산업에 대한 걱정이 많은 상황에서 처방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이 결합된 창조적 혁신으로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림원CEO포럼
영림원 CEO포럼은 2005년 10월 첫 회를 시작하여 매달 개최되는 조찬 포럼으로, 중견 중소기업 CEO에게 필요한 경영, 경제, IT, 인문학 등을 주제로 해당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강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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