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추억[이은화의 미술시간]〈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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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호숫가,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달빛 아래 서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푸른 호수에는 작은 보트가 떠 있고, 노란 달빛은 직선으로 호수를 가로지른다. 에드바르 뭉크(1863∼1944)가 1893년에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여름밤의 꿈·목소리’(사진)다. 뭉크는 왜 제목에 목소리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뭉크는 흔히 불안과 절규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의 그림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이 그림은 뭉크가 사랑을 그린 첫 작품으로, 모델은 그의 첫 연인이었던 밀리 탈로다.

1885년 22세의 뭉크는 탈로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순정을 다 바친 첫사랑이었다. 안타깝게도 탈로는 연상의 유부녀였다. 금지된 사랑이었기에 둘의 관계는 비밀리에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1년 정도의 짧은 연애였지만, 탈로는 뭉크의 심리와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후 뭉크는 사랑, 고통, 상실 등 사랑의 이중적 감정을 작품 속에서 꾸준히 반복해 다루기 시작했다.

그림 속 여인은 단순히 탈로의 외모를 재현한 게 아니다. 뭉크가 느꼈던 첫사랑의 설렘을 상징한다. ‘여름밤의 꿈·목소리’라는 제목은 이 그림이 현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여름밤의 꿈과 같았던 첫사랑의 추억과 청춘의 목소리임을 암시한다.

노란 달빛은 감상자의 시선을 여인에게로 자연스럽게 이끌며,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설레고 찬란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뭉크는 자신이 느꼈던 사랑의 이중적 감정을 여름밤 북유럽의 몽환적 풍경 속에 압축해 넣었다.

사랑은 인간 삶에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격렬한 감정이다. 뭉크는 여름밤의 목소리를 통해 묻는 듯하다. 당신은 지금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 여전히 설레는 마음이 있는가? 지금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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