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첫날이 떠오른다. 우연히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듣고 10대 때부터 꿈꿔온 중남미 배낭여행의 시작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 도쿄와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24시간 만에 멕시코 땅을 밟았다. 큰맘 먹고 택시를 탔지만 결국 예약한 곳과 이름만 같은 호텔에 내려 두려운 밤거리를 걸어야 했다.
이동 수단도 목적도 달랐지만, 120년 전에도 이 멕시코 땅에 발을 디딘 한국인들이 있었다. 가난하지만 조선을 떠나면 나으리라 생각한 1033명의 조선인은 한 달 열흘 만에 멕시코에 도착해 기차와 배를 타고 에네켄 농장이 모여 있는 유카탄반도의 메리다로 향했다. 그들에게 벌판의 황막함과 뜨거운 더위는 강렬했다.
이 이야기는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을 통해 처음 접했다. 나는 순식간에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떨어졌다가 과테말라의 밀림으로 넘어갔다. 여행 중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에네켄 농장으로 간 ‘조선인’들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위로할 정도로 강렬한 이야기였다.
좋은 일자리 대신 멕시코 이민자들을 기다린 것은 4년 동안 의무로 해야 하는 에네켄 농장의 고된 노동이었다. 그들은 채무노예로 팔려 가 무자비한 노동과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도 4년 후의 귀향을 꿈꾸며 견뎠다. 계약 기간이 만료됐지만, 여비가 없거나 마야 여인과 결혼하는 등의 이유로 귀국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에겐 돌아갈 나라마저 없어져 버렸다.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메리다는 가혹한 운명의 관문이자 애증의 정착지였다. 하지만 나에게 메리다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그 어느 나라의 문화와 언어도 배울 수 있고, 그 어느 나라에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장소였다. 밤 버스를 타고 도착한 호스텔 로비에서 나는 일본인 친구 미유키를 비롯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우리는 함께 살사를 추고 언어를 가르쳐주며 빠르게 친해졌다. 이 경험은 새로운 나라를 가야 할 때 큰 힘이 돼 주었다.
많은 이민자가 메리다에 남았지만, 멕시코 혁명으로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러다 대한인국민회는 과테말라 혁명군에서 병력을 보내주면 보상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용병으로 과테말라 밀림 티칼로 넘어간 대다수 사람은 그곳에서 죽었다. <검은 꽃>은 살아남은 자들의 남은 삶을 에필로그에서 보여준다.
나 역시 한인 용병처럼 멕시코를 떠나 24시간의 여정 끝에 티칼로 향했다. 아직은 만물이 눈 뜨기 전, 새벽. 나는 티칼 유적지의 한가운데 서서 정글 속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이곳에서 전투하고 나라를 세우고 죽어간, 소설 <검은 꽃> 속 인물들을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좋을 것이라고 믿고 시작한 멕시코 이주가 사실은 비참한 생활의 시작이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을 막을 힘도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꾸역꾸역 자신에게 부과된 4년의 강제노역을 마쳤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 방도를 마련했다. 사람답게 살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죽음으로 귀결된 삶도 있었다.
아마 우리의 삶 대부분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맞닥뜨리며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은 단지 사건(happening)일 뿐, 진짜 삶은 각자가 그 사건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전개될 것이다. 어쩌면 120년 전 이 땅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 멕시코에 발을 디디고 살아낸 멕시코 이민자들처럼, 매일 자신의 몫을 해내며 그냥 견디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1 month ago
11
![[사설] 檢 항소 포기, 대장동 일당과 李 대통령에 노골적 사법 특혜 아닌가](https://www.chosun.com/resizer/v2/MVRDCYLFGU2DOYLCGEZTCZRXME.jpg?auth=e7208408e32f3c86fca96d1cc26ab946aa0573ff3afc88149eaf47be452d2014&smart=true&width=4501&height=3001)
![[팔면봉] 검찰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여권 인사도 놀란 듯. 외](https://it.peoplentools.com/site/assets/img/broken.gif)
![[사설] 권력 앞에 검찰권 포기, 용기 있는 검사 단 한 명 없었다](https://www.chosun.com/resizer/v2/GRSDOM3GGRTDMMZVMIZWEMRSGI.jpg?auth=3660099caccde3b5cc42f8a35fb1d3d3ed7245720ce0ddba78c999c2772ee0ad&smart=true&width=399&height=255)
![[사설] 국힘 대표 부인이 김건희에게 가방 선물, 민망하다](https://www.chosun.com/resizer/v2/MVQTQNLDMJSDONRTMVQWINDBG4.jpg?auth=8141846de3d24a96723f9b1cff26e76f746dd63a88bb3beb44b86fbf01793855&smart=true&width=6673&height=4246)
![[朝鮮칼럼] ‘진보 정권의 아이러니’ 재현하지 않으려면](https://www.chosun.com/resizer/v2/VXXDKUIJUJCOLIT4M4DA47BFKY.png?auth=47d5c0a683690e4639b91281f2cab5fd3b413998a70d2183f12a92e1f1b8119d&smart=true&width=500&height=500)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287] K팝, 그래미상 ‘빅4′ 고지 오를까](https://www.chosun.com/resizer/v2/5XHK7PZ56NHTTKH7COJFQ4M54Q.png?auth=664876bab5cee8d9c73896a7d01b64f27386130e62bef9ae4289fdb3837c803b&smart=true&width=500&height=500)
![[동서남북] 원산·갈마 리조트에서 이산가족 상봉을](https://www.chosun.com/resizer/v2/273GIBFF3NCHBC5LVGUUIDK3GM.png?auth=2dc473a67ab5cc661f563ad05832554564124579b2d90352af8c3782f593b38f&smart=true&width=500&height=500)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95] 밥그릇 심장](https://www.chosun.com/resizer/v2/JZ2DPK7OZBANLBLB5SS5OH3S6I.png?auth=9fb621a8d43376974dd4c21736aba72e87fd3876911d9303e1df9f5adebb9cb7&smart=true&width=500&height=500)









English (U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