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고 고뱅이꽃’ 이야기 [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5 days ago 3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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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선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말 붙일 사람은 없다. 아프고 외롭고 낯설어서 다들 입을 다물고선 말을 삼킨다. 큰 병원에는 노인들이 많다. 고부라진 등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엄마 같아서 가슴에 소슬한 바람이 인다. 대기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추워라. 병원은 너무 추워. 뼛속까지 안 시린 데가 없네.” 그 말을 맞은편 할머니가 냉큼 주웠다. “춥지요. 늙으니까 온 데가 다 추워. 아고고 저 봐라. 꽃 피었네.”

볕 바른 창가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고고 아고고.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고고 예뻐야.” 엄마도 나를 보며 웃었다. 더 활짝 웃게 해 줘야지. 이때다 싶어서 아고고 고뱅이꽃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적 나는 ‘아고고 고뱅이’가 무슨 꽃 이름인가 했다. 산동네 꼭대기에 있는 할머니집까지 가려면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야 했다. 꽃 피어 울긋불긋한 언덕을 오르면서 할머니는 “아고고 고뱅이야. 아고고 고뱅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몇 걸음 걷다가 쉬고, 또 몇 걸음 걷다가 쉬면서 ‘아고고 고뱅이야’ 그러기에 할머니도 나처럼 꽃을 보나 했다. 어린 나는 나중에야 알았지. 고뱅이가 사투리로 무릎이란 걸. 아고고 고뱅이꽃 이야기를 꺼내면 엄마는 어김없이 웃는다. 파란 하늘로 향하던 언덕길을, 동백꽃처럼 핀 빨간 지붕집을, 엄마를 반겨주던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활짝.

이제는 엄마가 ‘아고고 고뱅이야’ 하고 혼잣말하는 할머니가 되었다. 무릎도 허리도 말도 못 하게 아프다는 엄마 손을 잡고서, 때마다 친정집에 가듯 때마다 병원에 간다. 아고고 아고고야. 탄식 같은 감탄을 내뱉으며 일부러 예쁜 걸 찾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맛있는 걸 나눠 먹는다. 아고고 고뱅이꽃 이야기처럼, 병원에 올 때마다 쌀쌀한 마음을 견디는 대신 따스한 기억을 만들어 두자던 약속이었다.

“봄이구나.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도 봄이었어. 아파서 서러운데 사방에 라일락 흐드러진 게 어찌나 예쁘고 향기로운지. 속도 모르고 꽃은 예쁘지. 예쁜 게 좋다고 가슴 설레지. 그래서 서러운 마음 달래지더라. 병원에 꽃이 많은 이유를 그제야 알았지. 때마다 꽃이 피는 게, 꽃이 예쁜 게 얼마나 희한한 희망이니. 수리야, 너무 애먹으며 살지 마라. 너는 나중에 아프지 마라. 창밖에 꽃 피고 계절 가는 거 자분자분 보면서, 그리 해낙낙하게 살아라.”

엄마의 눈가가 붉었다. 엄마는 이제 사람들이 다 소중해 보인단다. 아파 보니까 아픈 사람들이 눈에 밟혀서, 사람이 가엾고 귀하다고. 그렁그렁 웃는 엄마는 연민과 인정을 품고서 늙어간다.

병원 밖은 춥지 않았다. 엄마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봄볕 아래 노인들이 자박자박 걸어갔다. 라일락 향이 은은했다. 아고고 예뻐야. 아고고 아파야. 자식들 낳고 키우다 보니 고부라져 아픈 몸들이 아롱다롱 어른거렸다. 예쁘기도 하지. 여전히 감탄하고 탄식하면서 웃는 힘을 간직한 이들이 꽃보다도 예쁜 게, 내게는 얼마나 희한한 희망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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