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 이재용 삼성 회장의 등판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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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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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등장은 모두의 예상을 깬 파격이었다. 성과급 갈등으로 파업 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는 순간, 담당 임원이나 대표가 아니라 그룹 총수인 회장이 마운드에 나섰다. 이 회장이 마이크를 잡으면서 ‘공론의 운동장’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성과급 문제의 1차적 당사자는 노사(勞使)다. 하지만 스탠드의 관중 또한 격려하거나 압박하는 방식으로 협상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 유통이 빛의 속도만큼이나 빨라진 디지털 사회에서 대중은 방관자가 아니라 이슈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제2선의 이해 관계자다.

기업 밖에서 결정되는 기업의 운명

[비즈니스 인사이트] 이재용 삼성 회장의 등판이 남긴 것

최고위층이 등장했다고 해서 누적된 난제가 단숨에 해결되는 건 아니다. 성과급 산정 기준, 첨예한 노사관계, 공정성 시스템은 여전히 제도와 협상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 최고경영자가 어느 자리에, 어떤 높이로 서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 문제를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강력한 신호를 발신한 것이다.

오늘날의 위기는 기업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노사관계는 분배와 공정성 담론으로, 안전사고는 기업문화의 결함으로, 소비자 대응 실패는 경영자의 책임 문제로 확장된다. 큰 기업일수록 내부 문제도 산업 생태계, 노동시장, 투자 관계, 국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사건이 된다.

그 배경에는 비시장(non-market) 환경의 확대가 있다. 시장 안에서는 기술, 가격, 품질이 경쟁의 규칙이다. 그러나 시장 밖에서는 정책, 규제, 여론, 노동조합, 지역사회 정서가 기업의 운신 폭을 정한다. 때로는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기도 한다. 수치보다 프레임이 먼저 작동하고, 경제적 합리성보다 정치·사회적 해석이 앞선다. 사회가 기업의 의도를 믿지 않으면 좋은 사업 논리도 규제와 냉소의 벽을 넘기 힘들다. 최고경영자가 시장의 책임자를 넘어 사회적 관계의 책임자가 돼야 하는 이유다.

침묵도 하나의 메시지다

‘파라소셜(parasocial) 리더십’이라는 게 있다. 파라소셜은 대중이 직접 만난 적 없는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를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느끼는 등 그들과 주관적 친밀감을 형성하는 현상이다. 이제 이 현상은 기업 리더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 대중은 인터뷰, 영상, 위기 대응 장면을 반복적으로 접하며 기업 리더를 잘 아는 사람처럼 판단한다. 조직이 크고 복잡할수록 대중은 실적 자료보다 최고경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기업을 읽고 분석한다.

파라소셜 리더십은 최고경영자를 유명인으로 만들어 인기 관리를 하자는 뜻이 아니다. 본질을 잘못 이해하면 SNS에 공연히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부적절한 영상과 코멘트를 올려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침묵도 능사가 아니다. 과거에는 침묵이 신중함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회적 압력이 임계점을 넘으면 최고경영자의 부재는 중립이 아니라 회피로 읽힌다. 노동, 안전, 소비자 피해, 지역사회 갈등처럼 기업의 책임과 직접 연결된 사안에서 최고경영자가 보이지 않으면 대중은 이렇게 묻는다. 몰랐는가, 알고도 외면했는가, 책임을 실무진에게 넘겼는가. 침묵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의구심과 비난이 채워지는 해석의 공간이다.

리더십도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최고경영자가 모든 이슈에 나설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발언의 양이 아니라 판단의 정교함이다. 어떤 의제가 기업의 정체성, 사회적 책임, 생존 가능성과 연결되는지 먼저 가려야 한다. 연결고리가 확인된 순간에는 어떤 언어와 어떤 높이로 등장할 것인지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현대적 최고경영자 정체성, 즉 PI(President Identity) 전략의 핵심이다. PI는 이미지를 포장하는 홍보가 아니다. 활동과 의사결정을 설계하는 일이다. 던져야 할 질문은 세 가지다. 언제 나서고 언제 물러설 것인가. 누구를 먼저 만나 어떤 메시지를 낼 것인가. 무엇을 직접 감당하고, 무엇을 제도로 전환할 것인가.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할 때 리더십은 소진되지 않는다.

삼성전자 사례가 보여준 것은 이 부분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다. 기대보다 높은 책임자가 리스크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온 사실만으로 회사의 의지와 책임감을 보여주는 신호가 된다. 갈등의 해법은 협상과 제도로 풀더라도, 사회적 해석은 때로 그보다 먼저 움직인다. 파라소셜 리더십의 시대에 최고경영자는 장막 뒤에 머물 수 없다. 사회는 그를 렌즈 삼아 기업을 읽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먹혀들게 하는 것은 장황한 말이 아니라 의외성과 타이밍이다. 때로는 기대보다 높은 고위층의 전격 등판과 반보(半步) 앞선 빠른 대응이 효과적일 수 있다. 최고경영자의 PI 전략은 단순한 홍보가 아니다. 비시장 전략에 기반한 기업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매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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