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씻긴 가을[이준식의 한시 한 수]〈339〉

2 weeks ago 8

무더위는 바야흐로 약해져가고, 벌레 울음 밤 되자 더 잦아진다.

강과 호수에 한바탕 비가 지나자, 계절은 산뜻한 초가을로 바뀐다.

붓을 들 만큼 멋진 풍광 펼쳐졌으니, 그 누군들 아직 누각에 오르지 않았으랴.

서늘한 가을 흥취를 타고, 서쪽 푸른 숭산(嵩山)으로 노닐고 싶어라.

(暑氣時將薄, 蟲聲夜轉稠. 江湖經一雨, 日月換新秋. 有景堪援筆, 何人未上樓. 欲承凉冷興, 西向碧嵩遊.)

―‘초가을 비 갠 뒤의 저녁 풍경(조추우후만망·早秋雨後晚望)’ 제기(齊己·약 862∼937)

가을은 달력이 아니라 공기의 결로 찾아온다. 슬금슬금 더위는 가라앉고 밤이면 잦아지는 벌레 소리에 사람들은 슬며시 가을을 실감한다. 한바탕의 비 뒤끝에 세상 풍경은 마치 맑은 물에서 막 건져 올린 듯 새로워진다. 시인은 그 찰나를 포착한다. 비 갠 강호를 바라보니 해와 달조차 가을로 갈아입은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붓을 들고 싶었던 게다. 상큼한 경물을 앞에 두고 그 누군들 무언가를 쓰고 또 그려보고 싶지 않으랴. 누각에 오르는 일은 새 경치의 조망을 넘어 새로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시인이 그리는 숭산은 현실의 산이 아니라 마음의 향방(向方)인지도 모른다. 서늘한 가을의 기운을 받으며 일체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오도(悟道)의 길을 향하는. 제기의 속명은 호득생(胡得生), 당 말엽의 저명한 시승(詩僧)이다. 세상을 등지고 면벽참선(面壁參禪)에 정진하는 중에도 때로 시로 수행하며 지나는 족적마다 불경과 함께 풍경을 읊조렸다. 시승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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