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수가없다’
종이는 어딘가 우아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인간의 문명을 기록과 전파라는 행위를 통해 가능하게 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 활용을 위한 산림 훼손 같은, 종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숨겨져 있는 인간의 비정함이 보인다. 인간의 문명은 어쩌면 생존과 편리를 위해 무언가를 파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니던가.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인 만수(이병헌 분)가 25년을 일하다 정리해고된 회사가 하필 제지회사라는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그는 어떻게든 같은 분야에 재취업하려 ‘전쟁’을 벌이고, 자신이 면접 본 회사에서 3순위라는 걸 알고는 앞선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엉뚱한 결심을 하게 된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그 서사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변명이 되는 경쟁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은유와 풍자가 담겨 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듯, 사람은 인력시장 안에서 잘리고, 뽑히고, 버려지기도 하는 그런 존재가 됐다는 게 박찬욱이 꼬집는 세계의 비정함이다. 면접 보러 가는 사람에게 “다 죽여버려” 같은 말이 일상이 됐고 그렇게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기는 일은 실제로 그 삶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만수가 혼잣말하듯 변명처럼 말하곤 한다. “어쩔 수가 없다”고.환경 파괴가 재앙이 되어 시시각각 재난이 눈앞의 현실이 되고 있지만, 우리는 당장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삶을 바꾸지 못한다. 부정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당장의 먹고사는 게 바빠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를 외면한다. 나의 생존이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끝없는 비겁한 변명의 끝은 그래서 뭘까. 파국이 아닐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는.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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