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의 성장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의 신개념 항암제가 효과를 입증했다. 암세포가 자라도록 신호를 보내는 단백질만 골라서 제거하는 ‘프로탁(PROTAC)’ 항암제다. 내성 문제를 줄이고 치료 가능성을 넓힐 수 있어 새로운 항암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 첫 프로탁 신약 나오나
미국 사라캐넌연구소의 유방암 프로그램 책임자인 에리카 해밀턴 박사는 지난달 31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2025 미국임상종양학회’에서 “폐경 여부, 뼈 전이, 장기 전이 등과 무관하게 프로탁 항암제의 우월한 효능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화이자와 아비나스가 공동 개발한 유방암 치료제 베프데게스트란트의 글로벌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했다. 프로탁 기반 후보물질이 3상까지 진입해 긍정적인 결과를 낸 첫 사례다.
베프데게스트란트는 표적단백질분해(TPD) 기술의 일종인 프로탁을 적용해 만든 경구용 신약이다. 에스트로겐 수용체(ER) 양성 및 인간표피성장인자수용체 2형(HER2) 음성 유방암에서 암세포 성장의 핵심인 ER 단백질을 제거한다.
프로탁은 암을 일으키는 특정 단백질을 제거하는 차세대 경구 항암제 기술이다. 기존 치료제가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는 데 그쳤다면, 프로탁은 원인 단백질 자체를 없앤다. 표적항암제는 단백질의 특정 부위에만 결합해야 하는 한계가 있지만, 프로탁은 결합 부위에 제한을 받지 않아 더 다양한 표적을 겨냥할 수 있다.
임상 결과 2차 치료를 받는 ER 양성 및 HER2 음성 진행성 유방암 환자 가운데 에스트로겐 수용체 1(ESR1) 돌연변이가 있는 집단에서 베프데게스트란트의 암이 진행되지 않고 생존하는 기간인 무진행생존기간(PFS)은 5.0개월로, 기존 치료제인 풀베스트란트(2.1개월)보다 두 배 이상 길었다. ESR1 변이는 2차 치료 시점 환자의 약 40~50%에서 발견되는 내성이다.
복용 방식도 간편하다. 근육주사로 맞아야 하는 풀베스트란트와 달리 베프데게스트란트는 하루 한 번 200㎎을 경구 복용하면 된다. 부작용도 경미했다. 피로, 간기능 검사 수치(AST/ALT) 상승, 메스꺼움 등 일반적인 이상반응이 있었지만 대부분 1~2등급의 경증에 그쳤고, 심각한 위장관 부작용(구토·설사) 발생률은 6% 미만이었다.
베프데게스트란트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신속 심사 절차인 ‘패스트트랙’ 지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FDA가 세계 최초로 프로탁 신약을 허가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약 바꾸니 생존기간 두 배로
아스트라제네카는 또 다른 TPD 기술이 적용된 선택적 에스트로겐 수용체 분해제(SERD) 신약의 글로벌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했다. 호르몬수용체(HR) 양성 및 HER2 음성 유방암의 경구용 신약 카미제스트란트다. SERD는 프로탁과 달리 ER만을 표적으로 삼아 분해한다.
이번 임상은 1차 치료 중 순환종양핵산(ctDNA) 방식의 혈액검사로 ESR1 돌연변이를 조기 발견한 후 기존 치료를 유지한 환자와 카미제스트란트로 약을 전환한 환자를 비교한 연구다. 카미제스트란트 전환군의 PFS는 16.0개월로, 기존 치료 유지군(9.2개월)의 두 배 수준이었다. 부작용으로 치료를 중단한 환자 비율은 1%에 불과해 내약성도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로열마스덴병원의 종양학자 니컬러스 C 터너 박사는 “ctDNA 검사를 기반으로 항암제 1차 치료의 최적화 전략을 글로벌 임상 3상에서 최초로 입증한 결과”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유빅스테라퓨틱스, 업테라, 핀테라퓨틱스 등 바이오벤처들이 프로탁 신약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유빅스테라퓨틱스는 유한양행에 기술을 이전한 데 이어 국내 최초로 프로탁 기반 후보물질의 글로벌 임상시험에 진입했다.
시카고=김유림 기자 you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