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양주 레이크우드CC 산길·숲길 코스(파72)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선 박현경(25)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5월 17일 KLPGA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에서 5타를 줄인 박현경은 동갑내기 임희정을 한 타 차로 따돌리고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시절 유망주로 꼽혔던 박현경은 생애 첫 우승을 메이저 대회에서 거둔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당시 ‘코로나19 시대 첫 우승자’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박현경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요. 전반에 5타 차까지 벌어졌을 때 이번에도 우승이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내려놓고 플레이한 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승부를 뒤집었어요.”
KLPGA 역사가 시작된 곳
레이크우드는 한국여자프로골프의 발상지로도 불린다. ‘제1회 여자프로테스트’가 열린 곳이어서다. 이전까지 국내에 프로 골퍼는 남자밖에 없었다. 1978년 당시 로얄CC 명패를 단 이 골프장에서 1~4호 프로선수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 탄생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시작이 된 레이크우드는 KLPGA투어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KLPGA 챔피언십의 ‘붙박이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KLPGA 챔피언십을 개최했고, 2023년 대회 코스로 복귀한 뒤 계속해서 대회를 치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1972년 18홀로 개장한 레이크우드는 1992년 9홀을 증설한 데 이어 2015년 9홀을 추가 조성해 지금의 36홀이 됐다. KLPGA 챔피언십이 열리는 산길·숲길은 우드코스, 반대편의 물길·꽃길은 레이크코스로 불린다. 레이크코스는 오는 10월 16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KLPGA투어 ‘상상인·한경 와우넷 오픈 2025’의 대회장으로 쓰인다.
2025 KLPGA 챔피언십 개막(1일)을 일주일가량 앞둔 지난달 22일. 전국적으로 요란한 봄비가 쏟아진 날 레이크우드를 찾았다. 오전 8시48분 티오프라 8시 전에 프런트에 도착하니 직원이 진행 여부를 물었다. 규정상 강수량 3㎜ 이상이면 취소 및 홀별 정산이 가능해서다. 앞서 출발한 팀이 있냐는 물음에 직원은 “한 팀이 나가 계신다”고 답했다. 빗속에서 플레이가 안전상 문제가 없다는 확답을 받은 뒤 1번홀 티잉 구역에 섰다.
전반이 끝날 때쯤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플레이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KLPGA투어를 대표하는 대회를 개최하는 만큼 뛰어난 배수시설 덕에 그린 위에 고일 법한 물이 금세 사라졌다. 이날 그린 스피드는 2.6m가량. 정종길 캐디는 “일주일 뒤 대회 개막에 맞춰 그린 스피드를 3.4m까지 끌어 올릴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위기가 기회로...‘터닝포인트’ 된 홀
우여곡절 끝에 박현경의 역사가 시작된 숲길 1번홀(파4·대회 10번홀)에 들어섰다. 5년 전 박현경의 대역전극이 시작된 곳이다. 앞서 9번홀(파4)에서 약 1m 거리 파퍼트가 깃대를 맞고 튀어 나가 보기를 범한 박현경은 이어진 10번홀에서 세컨드샷이 그린 뒤 언덕 숲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또 위기를 맞았다. 나무 옆에서 어프로치샷을 잘 쳤음에도 5m라는 만만치 않은 거리의 파퍼트를 남겼는데, 이를 기어코 성공시켜 단독 선두 임희정과 2타 차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박현경은 “10번홀에서 파세이브가 흐름을 가져오는 결정적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돌아봤다.
대회 티 기준 401야드(367m)로 전장은 짧은 편. 다만 왼쪽으로 구부러진 홀이라 티샷을 페어웨이 오른쪽을 공략하는 게 중요하다. 페어웨이 중앙 왼쪽 끝부분에 큰 소나무가 있어, 만약 티샷이 왼쪽으로 꺾이면 그린이 시야에 가릴 수 있다. 정 캐디의 설명에 따라 티샷을 페어웨이 오른쪽으로 보냈다. 남은 거리는 196야드. 백돌이에겐 3번 우드로 쳐야 겨우 그린에 올릴 수 있는 거리였는데, 운 좋게 2온에 성공했다. 그러나 결과는 3퍼트 보기.
레이크우드 산길·숲길은 페어웨이의 언듈레이션은 완만하지만, 그린에 잔라이가 많아 퍼팅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분명 라인 계산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2m 남짓 거리의 두 번째 퍼트가 홀을 향하다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이를 지켜본 정 캐디는 “모든 홀 그린에 잔라이가 많아 결코 방심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장타 괴물’ 탄생한 핸디캡 2번 홀
박현경은 10번홀 파세이브로 기세를 올린 뒤 11번(파5), 12번(파3), 13번홀(파4)에서 3연속 버디를 몰아쳐 승부를 뒤집었다. 특히 12번홀에서 약 7m 먼 거리 버디퍼트를 떨어뜨려 공동 선두가 된 박현경은 13번홀 약 3m 버디퍼트로 단숨에 2타 차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이 홀에서 임희정이 보기를 범하면서다.
승부처가 된 13번홀은 숲길 4번홀이다. 벚꽃이 절정인 시기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홀이다. 전장이 416야드(380m)로 길지 않고, 티잉 구역에 서면 저 멀리 그린이 보일 정도로 굴곡도 심하지 않지만, 웬만한 싱글 골퍼도 파를 낚기 쉽지 않은 핸디캡 2번홀로 악명이 높다. 티잉 구역은 물론, 페어웨이 우측으로 해저드가 길게 그린 주변까지 연결돼 있고, 티샷이 떨어지는 지점은 개미허리처럼 좁기 때문이다. 페어웨이 중앙 왼쪽엔 벙커가 도사리고 있어 정확한 티샷이 필수인 홀이다.
슬라이스를 고려해 왼쪽에 보이는 벙커를 바라보고 티샷을 날렸다. 다행히 티샷은 정확히 페어웨이 중앙에 떨어졌다. 남은 거리는 170야드(155m). 그린 우측에 큰 벙커가 전체를 감싸고 있고, 좌측엔 2개의 포트 벙커가 위치해 어느 홀보다 정확한 세컨드샷이 필요한 곳인데, 5번 아이언으로 정확히 그린에 공을 올려 동반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물론 결과는 2퍼트 파.
이 홀은 방신실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린 곳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데뷔 첫해인 2023년 KLPGA 챔피언십 최종 4라운드 13번홀에서 티샷을 320야드(292m)나 날려 골프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즌 첫 출전 대회에서 엄청난 괴력을 뽐내며 공동 4위에 오른 그는 이 대회를 기점으로 ‘장타 괴물’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양주=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