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부르주아의 내밀한 글에 담긴 이야기[김민의 영감 한 스푼]

1 week ago 3

이스턴재단 큐레이터 인터뷰

루이즈 부르주아의 ‘밀실’ 연작 중 하나인 ‘붉은 방(부모)’(1994년)의 일부. 나무 문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관객은 좁은 틈을 통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방 안에는 붉은 침대와 장난감 기차, ‘사랑해(je t’aime)’라고 적힌 흰 쿠션이 놓여 있다. 
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루이즈 부르주아의 ‘밀실’ 연작 중 하나인 ‘붉은 방(부모)’(1994년)의 일부. 나무 문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관객은 좁은 틈을 통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방 안에는 붉은 침대와 장난감 기차, ‘사랑해(je t’aime)’라고 적힌 흰 쿠션이 놓여 있다. 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미국 뉴욕에 살고 있던 예술가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가 93세이던 2004년. 그의 집 한구석에서 낱장의 종이 꾸러미가 가득한 상자가 발견됩니다. 그 속에는 부르주아가 정신분석을 받으며 적었던 메모가 가득했죠. 약 5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을 때의 기록입니다.

호암미술관에서 지난달 30일 개막한 25년 만의 부르주아 대규모 회고전 ‘덧없고 영원한’ 전시장에 가면 벽면에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고정된 메모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메모는 바로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종이의 일부입니다. 이 기록을 연구하고 책으로 출간했으며, 지금은 미국 뉴욕 이스턴재단의 큐레이터로 세계에 부르주아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필립 라랏스미스와 지난달 29일 만났습니다.

―부르주아의 메모는 어떻게 발견됐습니까.

“제리 고로보이(부르주아의 조수)가 높은 곳에 있던 상자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2004년 커다란 상자가 먼저 발견되고, 2010년엔 두 번째 상자가 발견됐죠. 루이즈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부터 옷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았어요. 이 기록도 그중 하나입니다.”

―부르주아는 이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줄 몰랐다고요.

“맞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과거에 집착한 예술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제가 본 부르주아는 늘 ‘지금’을 사는 사람이었어요. 기억을 재료로 작업해도, 그는 작품을 만들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갔죠. 예술가들은 자기 문제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나면 일종의 해소를 겪어요. 제가 이걸 아는 이유가 있어요. 2005년에 전시 준비를 하며 루이즈에게 35년 전 만든 조각을 보여줬는데, 자기 작품인지 기억을 못 하고 ‘이거 좋네’라고 했거든요.”

―당신은 어떻게 부르주아와 일하게 됐나요.“처음에는 제리의 부탁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저는 하버드대에서 그리스 라틴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술을 잘 모르고, 문학을 한다는 걸 부르주아는 더 좋아했어요. 그는 예술가보다 문학가가 뛰어나다고 생각했거든요.”

―부르주아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2001년 부르주아를 만났을 땐 연약하지만 매혹적이고 지적 호기심이 강렬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22세였던 저는 그때 독일 베를린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지금까지 그의 예술 세계와 함께하고 있네요. 그가 세상을 떠난 2010년까지는 기록을 정리하고 연구했습니다.”

―그 연구를 바탕으로 책 ‘억압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2012년)를 냈군요.

“저와 제리는 부르주아의 메모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사생활에 관한 내용도 있으니 허락이 필요했죠. 당시 90대였던 부르주아는 작품에서 이미 모든 걸 고백했고, 더 이상 숨길 게 없으니 책을 내도 좋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비밀 없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요.”

―물론 이 책은 부르주아의 비밀을 밝히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 기록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연구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나, 16세기 조각가 첼리니의 자서전과 달리 이 글은 정신 분석 상담을 위해 쓴 글이거든요. 그래서 작가의 마음 상태를 순수하게 반영하고, 부르주아가 초기 작품에서 변화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죠. 또 부르주아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에 예술가가 됐다는 단순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신화를 바로잡아 준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미국 뉴욕의 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루이즈 부르주아. 이 집 옆 건물은 현재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를 연구하고 알리는 ‘이스턴재단’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스턴재단 제공

미국 뉴욕의 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루이즈 부르주아. 이 집 옆 건물은 현재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를 연구하고 알리는 ‘이스턴재단’의 사무실로 이용되고 있다. 이스턴재단 제공
―부르주아 예술이 주는 감동은 우리가 흔히 외면하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데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의 글엔 부모님에 대한 복잡하고 양가적인 감정이 들어 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 부드러움과 단단함 같은) 대립하는 요소들이 양립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이 호암미술관 전시의 뼈대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는 호주 시드니에서 시작한 아시아 태평양 순회전의 마지막인데, 호암 전시는 어떻게 구성됐나요.

“2023년 시드니, 지난해 일본 도쿄와 대만 타이베이를 거쳐 한국이 네 번째 방문지입니다. 주요 작품은 같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호암 전시는 양가적 요소, ‘무의식’과 ‘의식’의 공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재밌는 건 통념과 달리 2층이 무의식과 관련된 장소라는 점이에요. 또 전시에는 미술관 소장품도 다수 포함됐는데, 리움이 아시아에서 부르주아의 가장 좋은 컬렉션을 갖고 있습니다. 미술관 이진아 큐레이터의 도움으로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있었어요.”

―이제 부르주아의 작품이 한국 관객을 만날 차례입니다. 어떤 기대를 하십니까.

“일본에서는 관객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한국 관객은 어떨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25년 만의 전시이니 젊은 관객에겐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고, 나이 든 관객에게도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부르주아의 예술 세계를 보여드릴 수 있겠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전은 내년 1월 14일까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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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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