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국수(國手) 이세돌을 꺾는 순간 인공지능(AI)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바로 '알파고 모먼트'다. 이후 딥마인드는 네이처지 논문에서 이세돌과의 대국에 나서기 전 알파고가 수백만 번 자기 자신과 경기를 했다고 밝혔다.
딥마인드가 9년 만에 또 한 번의 알파고 모먼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는 탁구다. 딥마인드가 21일(현지시간) 로봇이 스스로 탁구 경기를 펼치고 코칭까지 하는 기술을 공개했다.
이날 딥마인드는 미국 전기전자학회보 스펙트럼을 통해 두 대의 로봇 팔이 스스로 경기하는 '자기 개선 탁구 에이전트'를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딥마인드가 공개한 영상에서는 탁구대 양쪽에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두 대의 로봇팔이 유연하게 팔 각도와 세기를 조절하며 능숙하게 랠리를 펼쳤다.
딥마인드는 지난해 11월 인간과 탁구를 치는 로봇을 공개했다. 딥마인드는 이 로봇이 최고 수준 선수에는 못미쳤지만, 아마추어 선수의 절반 정도는 이길 수 있었다고 전했다.
딥마인드는 한 발 더 나아가 로봇과 로봇 간의 경기를 준비했다. 알파고가 기존 16만개의 바둑 기보를 학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대련을 통해 실력을 쌓았듯 자기 개선 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파나그 산케티 딥마인드 로봇공학팀 수석기술책임자는 "로봇이 전체적이고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적응하기 위해 사람의 개입을 줄일 방법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딥마인드는 알파고에 적용한 전략을 그대로 도입했다. 두 탁구 에이전트가 서로 경쟁하며 학습하도록 했다. 한 로봇이 더 나은 전략을 개발하면 다른 쪽도 대응책을 마련해 선순환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시도는 쉽지 않았다. 사람은 최소한의 실력만 갖추면 상대 네트 너머로 정확하게 공을 보낼 수 있는 반면 로봇들은 한 번의 랠리를 성공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딥마인드는 두 로봇이 서로 공을 주고받는 데 집중하는 랠리(협력 게임)를 구현하는 데는 성공했다. 다만 실제 점수를 내야 하는 게임(경쟁 게임)을 구현하는 것은 아직 어려운 단계라고 설명했다. 현재 로봇이 가진 모델의 크기가 작아 새로운 샷을 치면 기존 샷에서 학습한 내용을 잊고 결국 짧은 랠리를 주고받은 뒤 경기가 끝나버려서다.
로봇 선수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특별 코치가 투입됐다. 구글 AI 모델인 제미나이다. 대규모언어모델(LLM)인 제미나이는 경기 장면을 시각적으로 분석하고, 로봇들에게 "테이블 가운데 끝으로 공을 보내라" "네트 가까운 쪽으로 깎아서 쳐라"고 지시했다. 기존에는 로봇 팔들이 '상대가 공을 받아치지 못하면 득점'과 같은 보상 학습만 가능했는데, LLM을 통해서는 언어를 이용한 구체적인 학습이 가능하다는 게 딥마인드의 설명이다.
실제 스포츠인 탁구까지 AI가 정복하는 것은 AI 발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이정표라는 평가가 나온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10의171승으로 무한대에 가깝지만, 바둑판 위에서 일어나는 수의 집합인 만큼 반복 구현이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 탁구는 실제 물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피지컬 AI'의 영역이다. AI가 날아오는 공을 인식하고, 정확한 각도와 속도로 탁구체를 휘둘러야 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전략적 판단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딥마인드는 탁구를 통해 피지컬AI를 완전히 구현할 경우 제조업이나 가정환경 등에도 바로 접목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로봇이 실제 세상을 이해하고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에는 막대한 투자금이 몰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 14일까지 1년 간 벤처캐피털(VC)들이 로봇파운데이션 모델 개발기업에 투자한 자금은 총 25억달러(약 3조4580억원)에 달한다. 전년 대비 136.1% 증가한 수치다.
엔비디아, 테슬라, 아마존 등도 로봇파운데이션모델을 미래 먹거리로 보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 5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용 오픈소스 파운데이션 모델인 GR00T N1을 공개했다.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100만개가 넘는 자사 물류·배송 로봇에 AI 파운데이션 모델 '딥플릿'을 적용해 데이터를 쌓고 있다. 테슬라는 내년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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