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의 은퇴를 앞둔 중견·중소기업의 공통된 관심사는 가업 승계다. 한국의 상속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금을 내고 나면 2세 경영진의 지분율이 뚝 떨어진다. 특히 중견기업은 중소기업보다 가업상속공제 요건이 까다로워 세금 부담이 더 크다. 자녀가 기업을 물려받을 의사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업은 선택지가 많지 않다. 사모펀드에 기업을 매각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자본시장연구원은 가업 승계의 어려움에 따른 중견·중소기업 잠재 매물을 21만 개 안팎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엔 정수기 제조사 청호나이스가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칼라일에 회사를 매각하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사모펀드 경영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 경영 효율화를 통한 단기 성과 제고엔 강점이 있지만 한계도 뚜렷하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무리한 구조조정에 나서거나 연구개발(R&D) 투자를 축소해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훼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경영 전문가가 충분한지도 논란거리다. 국내 사모펀드 운용역 대다수는 회계사 또는 컨설턴트 출신이다. 재무에는 강점이 있지만 기술 혁신과 글로벌 시장 개척 같은 실전 경영 능력을 갖췄는지는 불확실하다.
짧은 만기가 밸류업 걸림돌
물론 사모펀드도 할 말은 있다. 이들은 외부 투자자의 자금을 유치해 펀드를 조성하는 데 만기가 통상 7~10년이다. 이 기간에 기업의 몸값을 불려 되파는 데 성공하려면 구조조정과 비용 통제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호흡이 긴 기술 개발이나 초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것도 쉽지 않다.
최근 블랙스톤과 KKR 등 글로벌 사모펀드는 초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삼는 워런 버핏의 투자회사 벅셔해서웨이를 벤치마킹 중이다. 10년 내에 엑시트(자금 회수)를 해야 하는 단기 펀드로는 인수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만기를 없앤 영구 자본 펀드 비중을 늘리고 있다. KKR의 지난 1분기 운용자산(AUM) 7580억달러 중 절반에 육박하는 3260억달러가 영구 자본 펀드다. 보험 등 호흡이 긴 투자를 하는 기관이 이 펀드에 자금을 넣고 있다.
일본식 승계 펀드 도입 검토해야
일본에선 자녀가 아니라 직원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승계 펀드 실험이 한창이다. 노무라와 이토추상사, 미쓰이스미토모 신탁은행 등이 참여하는 ‘팀 석세션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사모펀드가 회사 경영권을 사들이고 기업을 효율화하는 것은 똑같다. 차이점은 엑시트 방식이다. 경영자의 자질을 갖춘 직원을 찾아 스톡옵션을 부여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주식으로 전환하게 한다. 사모펀드는 보유 지분을 자사주 형태로 회사에 팔아 투자금을 회수한다.
가업 승계 절벽을 해결하기 위한 정공법은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가업상속공제 요건을 완화하거나 세금을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내게 하는 등의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2세 경영이 여의치 않은 기업엔 미국과 일본처럼 국가 금융 인프라를 활용하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만기가 긴 펀드나 승계 펀드 등을 조성하는 방안을 고민해볼 만하다. 업력이 긴 중견·중소기업은 국가 경제의 큰 자산이다. 가업 승계 절벽을 넘는 방법과 관련해 사회적 논의가 시급한 시점이다.

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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