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우리의 발전 방향을 결정해 왔지만, 이처럼 첨단 기술이 동시에 폭발적으로 융합되는 시기는 드물었다. 특히 인공지능(AI), 데이터 분석, 고성능 컴퓨팅(HPC:High Performance Computing), 클라우드 인프라, 그리고 윤리적 거버넌스 프레임워크는 서로 맞물리며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연구실이나 이론적 영역을 넘어 실제 일터, 가정, 주변 커뮤니티 및 사회에 스며들어 우리의 의사소통 방식, 의사결정 과정, 심지어 인간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꿔놓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래를 설계한다'라는 것은 단순히 기술을 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적 발전과 윤리적 책임, 그리고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적 요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판을 바꾸는 기술들은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인쇄술은 지식 유통에 혁명을 일으켰고 전기는 산업 지형과 삶의 양식을 뒤바꿨으며 인터넷은 지리적 경계를 허물어 전 세계를 하나의 '마을'과 같은 공동체처럼 만들었다. 이제 21세기에 접어들어, AI와 데이터 분석이 또 다른 도약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기계가 자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인간의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를 상상해 보면, 단순히 기술적 혁신을 넘어 윤리적·철학적 고민으로 확장된다. 과거에는 로봇이 자동차 공장이나 단순 반복 노동을 대체하리라 예측했지만, 지금은 AI가 법률 문서를 검토하고, 창의적 텍스트를 작성하며 의료 진단까지 담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인간'과 '기계'의 지능 사이 경계가 갈수록 흐릿해지는 가운데, 이는 공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술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예측이 어렵다 보니, 그대로 내버려두면 윤리나 사회 제도가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문제를 초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I 에이전트가 업무를 자동화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데이터를 누가 통제하고 어떤 편향이 내재해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AI, 데이터 분석, HPC 등이 융합되는 세계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지, 왜 개발하고 누구를 위해 활용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몫이다. 이런 의식적 판단이 없다면, 기술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전 기고에서 논했던 에이전틱 AI(Agentic AI)도 마찬가지다. 에이전틱 AI란 상황을 해석하고 목표를 수립하며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이는 단순 기술 발전이 아니라 사회·경제·정치 전반에 큰 변화를 예고한다. 예를 들어 AI 에이전트가 기업 간 협상, 정책 초안 작성을 돕거나, 선거 활동을 맞춤형으로 타겟팅한다면 어떨까. 이미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이 여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에이전틱 AI는 그 파급력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AI의 강력함을 단순히 환영할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하고 약점을 보완하며 공동체의 이익을 키우도록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AI, 엣지 컴퓨팅, HPC, 양자 컴퓨팅 등과 같은 기술들은 우리에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회를 열어 주지만, 그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고르게 돌아가야 진정한 발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혁신의 진짜 가치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선한 힘'으로 이끌어 갈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AI가 창출하는 창의적 활용, HPC로부터 나온 통찰, 윤리적 거버넌스를 통해 다듬어진 시스템,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면, 더욱 공정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형 단국대 대학원 데이터지식서비스공학과 교수·정보융합기술·창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