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칼럼] 책, 현대판 '오푸스 프랑키게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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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독일 쾰른 대성당 같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중세 유럽의 고딕 양식 건물은 보는 이를 절로 압도한다.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은 13세기 후반 프랑스 기술자들이 버트레스(건축물을 외부에서 지탱해 주는 장치)를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버트레스로 석조 건물의 무게 하중을 적절하게 분산하면서 천장을 더 높이 올릴 수 있었다. 벽체 부담을 줄이면서 대형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건물 내부에 더 많은 빛이 들어오게도 했다.

고딕 양식의 상징이 된 아치 모양 천장 지붕은 ‘프랑크인(프랑스인)의 작품’이라는 뜻의 ‘오푸스 프랑키게눔(opus francigenum)’으로 불렸다. 이 기술은 1263년 하이델베르크 인근 빔펜에 도입됐고 쾰른, 밤베르크, 나움베르크 등 독일 전역으로 확산했다. 후일 스웨덴 웁살라와 지중해의 키프로스 성당에도 이 기술이 적용됐다. 기술 중 상당수는 프랑스 건축가와 노동자가 각지로 이민하면서 전수했다. 오늘날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남아 있는 22장의 양피지 도면처럼 당시에도 상세한 설계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드높은 성당을 세우는 데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장인의 ‘경험’과 ‘암묵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양 건축사의 한 장면을 떠올린 것은 최근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317명이 체포·구금된 사태가 오버랩돼서다. ‘건설 현장에 더 많은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미국 당국은 배터리공장 건설을 단순히 건물을 세우고 기계를 들여놓으면 끝나는 일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정교한 도자기 굽기’에 비견될 정도로 공정이 섬세한 배터리공장은 레고블록 조립하듯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세 대성당이 프랑스인 건축 장인 없이 세워질 수 없었듯 현대의 첨단 공장도 수많은 장치와 시설을 이리저리 맞추고 조정해 본 전문가의 경험이 필수적이다.

중세 대성당이나 미국 배터리공장 건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핵심 기술은 사람과 함께 전수된다.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기술과 지식을 전달하는 ‘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지난 수천년간 인류의 대표적인 지식 전달 수단은 책이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유튜브, 인공지능(AI) 등의 등장 이후 눈에 띄게 책이 선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면 AI가 척척 답변을 쏟아내고, 한참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쉽지 않던 내용도 유튜브 동영상은 알기 쉽게 눈앞에 보여준다. 먼지가 풀풀 일 것만 같은 책장을 펼치는 것은 왠지 미덥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AI와 인터넷·동영상으로 손쉽게 접하는 정보가 책이 수행하던 지식 전수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그저 건물만 올리고 기계를 도입하면 공장이 저절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만큼 성급한 생각이지 싶다. 당장 인터넷에 정보가 널려 있어도 그것만 가지고 첨단 공장을 지을 수는 없지 않나.

책장에 나란히 꽂힌, 필자가 몸담은 출판사가 최근 내놓은 책들을 살펴본다. 팰런티어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전문가가 회사의 속사정을 전해주는 <팔란티어 시대가 온다>, K뷰티의 주역 코스맥스의 성장사를 회사 창업자가 정리한 <같이 꿈을 꾸고 싶다>, 삶을 비운 공허의 가치를 잔잔한 어조로 되짚어보는 <공허에 대하여> 등 AI나 인터넷 검색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책만이 전할 수 있는 콘텐츠가 가득하다. 그렇게 한층 한층 돌을 쌓듯 책을 펴내다 보면 언젠가는 ‘지식의 대성당’에 대들보를 올릴 것이라고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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