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얼굴'은 지난 11일 개봉 후 첫 주말 28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모으며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박정민은 출연료 한 푼 받지 않았다. 15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난 그는 "1원도 안 받았어요. 기름값만 나갔죠. 제 돈 썼습니다"라며 웃었다. 노개런티로 출연한 박정민은 영화 흥행에 따라 보수를 받는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했다. 그는 "그거를 기대하고 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가져가는지 이런 것도 잘 모른다"고 고백했다.
'얼굴'은 시각장애인 전각 장인 아버지와 아들이 40년 전 실종된 어머니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다. 보지 못하는 이가 아름다움을 새기고, 보지 못한 어머니의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영화는 한국 사회가 무엇을 밟고 성장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연상호 감독이 직접 쓰고 그린 원작 만화를 토대로 한 이 영화는 극강의 효율성을 자랑했다. 프리비주얼로 사용한 원작 덕에 프리 프로덕션이 단 2주 만에 끝났고, 본 촬영은 3주 남짓 13회차 만에 마무리됐다. 보통 장편영화가 2~3개월을 기본으로 잡는 것에 비하면 놀라운 속도다. 박정민은 "대학 시절 우리끼리 영화를 찍던 느낌이었다. 분업이 줄어들어 헤드 스태프도 줄었지만, 오히려 호흡을 잘 맞춰온 팀이라 더 편했다"고 전했다.
제작비는 2억 원을 들인 이 영화의 개봉 첫 주 결과는 놀라웠다. 4일 만에 누적 관객 31만 7243명, 매출액은 33억 원을 기록했다. 영화계 전반이 침체기에 빠진 상황에서 '작은 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민은 "이 정도 예산으로 계속 영화를 만드는 건 힘들다. 다만 이번 영화가 다양한 제작 시도의 기점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박정민의 연기 도전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1인 2역을 맡았다. 시각장애인 아버지 임영규와 현대의 아들 임동환 두 역할을 오가며 극을 끌고 간다.
"퐁당퐁당 찍었어요. 전혀 힘든 게 없었어요. 아들 역할은 제 개인의 모습을 끌어와도 충분했죠. 그러나 과거로 가는 순간에는 의상, 머리, 분장, 렌즈. 이런 것들에 기대기도 했습니다. 도장을 판다거나 권해효 선배와 싱크를 맞추는 장면에서 고민을 하긴 했지만 전혀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그저 믿고 가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촬영 시간은 짧았지만 집중력은 오히려 높았다. 박정민은 "짧게 찍으니까 배우들에게 시간이 얼마 없다. 고민하며 연기를 발전시킬 여지가 없고, 웬만하면 한두 테이크 안에 끝내야 했다. 생각을 많이 해와야 했다. 늘어지는 시간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계산이 서니까 좋았다"고 설명했다.
박정민은 이번 작품에 참여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원작의 팬이었어요. 연상호 감독이 이걸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큰돈으로 찍었으면 안 받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적은 돈으로 찍는다고 하니까. 영화 예산으로 치면 아주 적은 돈이거든요. (노개런티는) 그 마음으로 예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사실 감독이 얼마 정도 주신다고 했는데, 차라리 회식에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죠. 하하"
작품의 의미를 묻자, 그는 연상호 감독의 사회적 시선에 주목했다. 그는 "연 감독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바라본다. '지옥'도 그래서 좋아했다. '얼굴' 원작은 그 이전에 나왔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감독님이 '고도성장한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무엇을 밟고 일어섰는가, 지금 돌아봐야 한다면 무엇을 봐야 하는가'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작품에 대해 깊이 알게 됐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원작과 영화의 중요한 장치인 '어머니의 얼굴'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정을 털어놨다. "원작을 볼 때 마지막에 사진이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예상을 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어떤 얼굴이기에 사람들이 괴물 같다, 못생겼다 하는 걸까 싶었죠.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자괴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촬영 중에 누군가의 실수로 사진을 먼저 봤는데, 그때 울컥했어요. 한번도 보지 못한 엄마지만, 이상한 마음들이 밀려왔습니다."
박정민은 이번 영화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것이 매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장면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그걸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어쨌든 간에 이야기거리를 던졌다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며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의 질문들이 이어지는 작품"이라고 부연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외모와 배우로서의 고민도 숨기지 않았다. "저는 제 얼굴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덤덤히 말했다.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서 기준에 따라 다르죠. 하지만 배우를 하기에 적합한 얼굴인가 생각하면 아닌 것 같아요.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얼굴이란 생각입니다. 저는 모니터를 하면 마음에 안 들어요. 살아가기엔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지만, 배우라는 직업으론 좋은 얼굴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박정민은 데뷔작 '파수꾼' 이후 꾸준히 한국영화의 한 축을 지탱해왔다. '동주'의 송몽규, '그것만이 내 세상'의 진태, '염력' '사바하' '시동'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에서 다양한 변신을 이어왔다. 그는 "'얼굴'은 힘들었다, 어려웠다 이런 기억이 하나도 없는 영화"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얼굴'은 결과적으로 박정민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작품이 됐다. "막상 시작을 해보니까, 영화배우가 되고 인지도가 높아지면 좋은 작품, 큰 작품 주인공 하고 싶고 욕심들이 덕지덕지 붙어요. 그런데 예전에 제가 정말 영화 좋아하고 출연하고 싶을 때 하고 싶었던 게 이런 이야기였죠. 질문 던지고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말이에요. 여건에 의해 못하다가 우연히 하게 되니 환기도 되고, '영화에 대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