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가 지난 28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이란 전쟁을 계기로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하고 있다. 의약품 공급망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미국은 2026년 2월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UAE·바레인·모로코에 식품의약국(FDA) 사무소를 설치해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새 거점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는 미국이 2022년 4월 공식화한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 전략의 일환이다. 핵심 공급망을 신뢰할 수 있는 우방으로 옮기겠다는 취지다. 누구와 거래하느냐가 무엇을 거래하느냐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효율성의 시대가 가고 신뢰의 시대가 왔다.
반면 우리나라의 의약품 안보는 불안하기만 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원료의약품(API) 자급률은 2023년 기준 25.6%다. 수입국은 중국 37.7%, 인도 12.5%로 두 나라에 절반이 쏠려 있다. 이 의존이 무기화하는 순간 정부도 의사도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없다. 의약품 안보는 더 이상 산업 정책이 아니라 안보 정책이다.
그런데 우리 제약산업의 체력은 어떤가? 글로벌 제약사인 MSD가 2024년 한 해 연구·개발에만 약 25조원을 썼다. 같은 해 한국 의약품 시장 전체 규모의 78%에 해당한다. 수백 개 제약사 중 매출이 1조원을 넘는 곳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규모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내 제약사는 매출의 절반 이상이 복제약 판매에서 나온다. 단순 수입 판매까지 합치면 그 비중은 더 높다. 제도도 문제다. 동일 성분 복제약이 수십 개씩 등재가 가능하다. 이런 시장에서 차별화 수단은 영업밖에 없다. 불법 리베이트가 단속과 음성화의 끝없는 숨바꼭질을 반복하는 이유다.
이런 구조로는 프렌드 쇼어링 시대에 생존하기 어렵다. 베트남·인도가 같은 자리를 노리고 UAE·바레인이 새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의약품 제조 거점’이라는 위상은 대형 자본·강한 연구개발(R&D)·글로벌 제조·품질관리(GMP) 능력을 갖춘 나라에만 주어질 것이다. 기회의 시간은 길어야 3~5년이다.
뼈를 깎는 혁신이 필요하다.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모든 제약사를 단일 산업으로 다뤄서는 혁신이 어렵다. 글로벌 트랙은 신약·바이오 중심으로 연구·개발 세제와 혁신 약가로 지원하고, 국내 트랙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한 점진적 통폐합으로 합리화해야 한다.
둘째, 약가 정책의 재설계다. 먼저 동일 성분 복제약 등재를 5개로 제한해야 한다. 혁신 신약에는 글로벌 수준 약가를 보장하되 위험 분담제 등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가격은 자유롭게, 사용은 엄격하게”라는 영국·독일 모델이 한국에도 필요하다.
셋째, 리베이트 구조의 근원적 차단이다. 단속 강화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거래의 강제 공시, 의약품 영업사원 인증제 도입 등으로 의사의 처방 결정과 제약사 영업을 구조적으로 차단해야 한다.
넷째, 의약품 안보의 외교화다. 송도·인천 등 바이오 거점을 의약품 프렌드 쇼어링에 대비한 핵심 노드로 격상해야 한다. 산업통상부·보건복지부·외교부·식약처를 묶는 ‘의약품 안보 컨트롤 타워’ 구축은 필수다.
효율성의 시대는 갔고, 신뢰의 시대가 왔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능동적 청산인가, 수동적 강요인가의 선택뿐이다. 지금이 그 갈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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