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북은 해당 언론사 기자가 어떤 표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리한 ‘맞춤법 매뉴얼’이다. AI를 업무에 들이기로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스타일북을 학습시킨 것이었다. 인터넷 맞춤법 검사기처럼 스타일북 검사기도 있으면 편하겠다 싶었다.
그 뒤로 동아일보 기사 스타일을 가르치고 또 가르친 덕에 ‘초벌 데스킹’ 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다. 마감 시간에 쫓겨 AI 검수 버전 그대로 가판(架版) 기사를 넘긴 적도 있었는데 추가 데스킹 과정에서 결정적 오류를 발견한 적도 사실상 없었다. 잘 키운 AI 하나, 열 데스크 안 부럽다.
그렇다고 AI를 무조건 믿고 탱자탱자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AI는 스타일북 규정을 척척 읊을 수는 있어도 문장에 담긴 뉘앙스나 숨은 맥락까지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계는 결코 책임을 질 수 없다. 책임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던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테니스 세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은 AI 선심을 도입하면서 이 사실을 간과했다. 인간 심판에게 ‘정정 권한’을 주지 않은 게 문제였다. AI에도 치명적 약점 그러니까 아킬레스힘줄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탓에 아나스타샤 파블류첸코바(34·러시아)와 소나이 카르탈(24·영국)이 맞붙은 7일 여자 단식 16강전에서 이 대회 148년 역사상 전례 없는 장면이 나왔다.
두 선수가 게임 스코어 4-4로 맞선 1세트 아홉 번째 게임. 파블류첸코바가 게임 포인트를 잡고 승기를 굳혀 가던 순간 카르탈이 포핸드 샷을 날렸다. 공은 라인을 20cm쯤 벗어나 잔디 위에 떨어졌다. AI 심판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테니스에서는 심판 콜이 있어야 아웃 판정을 내릴 수 있다. 인간 주심이 직권으로 경기를 중단시켰지만 판독 센터에 확인 요청을 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관중석에서 ‘아웃’이라고 웅성대는 사이 ‘리플레이’라는 최종 결론이 나왔다. 앞선 장면은 없던 걸로 하고 경기를 다시 하라는 의미였다. 게임 스코어 5-4로 앞설 기회를 놓친 파블류첸코바가 “한 게임을 도둑맞았다”고 항변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파블류첸코바가 기어코 역전승을 거둔 뒤에야 이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윔블던을 주최하는 올잉글랜드클럽은 “사람 실수로 AI 시스템에 전원 공급이 끊겨 생긴 일”이라며 “AI 심판 정확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AI 심판의 권위를 지키려 인간이 책임을 떠안은 셈이다. 이쯤 되면 ‘AI는 절대 틀려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아킬레스힘줄 아닐까. 아, 이 ‘광화문에서’ 원고를 잘 썼는지 물었더니 AI는 ‘네가 쓴 건 네가 책임지라’고 답했다.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