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성민]‘안락사 찬성 80%’ 이면 불편한 진실 직시해야

4 weeks ago 11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했다. 지난해 사망자의 약 6%(9958명)가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안락사 대상도 점차 확대돼 현재 치매와 정신질환까지도 안락사를 허용한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이라는 측면에서 네덜란드는 가장 앞선 국가다.

그런 네덜란드에서도 안락사를 둘러싼 논란은 크다. 지난해 정신질환을 이유로 안락사를 택한 219명 중 29명(13%)은 20대였다. 16∼19세 청소년도 있었다. 당사자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순 없지만, 청년들이 삶을 쉽게 포기하도록 국가와 사회가 내몰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네덜란드에선 2020년 ‘75세 이상 안락사 선택 법안’, 2023년 ‘1∼11세 안락사 허용 법안’ 등이 발의돼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번 문턱이 낮아지자 안락사 대상을 넓히려는 사회적 압력이 더 커진 것이다.

국내에서도 안락사 도입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다. 최근 수년간 안락사 관련 설문에선 찬성 응답이 꾸준히 70∼80%대를 기록했다. 외국인의 조력 사망이 허용된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인은 10여 명, 대기자는 약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를 살리는 게 본분인 의사들도 과거 안락사 합법화에 부정적이었지만, 최근엔 환자 고통 경감과 편안한 임종을 위해 안락사를 받아들이자는 목소리가 늘었다.

하지만 안락사 도입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이들은 “안락사 찬성 80%를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단순히 안락사 도입에 대한 찬반을 묻지 않고, 실제 자신과 가족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의 안락사 의향을 물으면 찬성 비율이 더 낮다는 것이다. 한 웰다잉(well-dying) 전문가는 “좋은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사회적 기반이 부재하니 안락사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는 것 같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경제적 문제나 가족의 돌봄 부담을 덜기 위한 비자발적 안락사 가능성이다. 실제 여러 설문에서 안락사 찬성 응답자 중 상당수는 ‘가족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안락사 도입을 원한다고 답했다.

안락사 합법화는 자칫 취약계층에게 삶을 포기하도록 등을 떠미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의료비가 부담스러운 빈곤한 노인, 오랜 시간 가족이 간병 부담을 떠안아 온 희소 질환자 등은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안락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노인 빈곤율 38%, 인구 10만 명당 노인 자살률 40.6명의 한국에선 안락사가 버거운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사회적 타살’ 장치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저소득층,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다.

안락사도 언젠가는 국내에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안락사 합법화보다 선행돼야 하는 건 생애 마지막까지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의료·돌봄 서비스 확충이다. 말기 환자라면 누구나 큰 부담 없이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후 빈곤과 재난적 의료비를 걱정하지 않을 사회 경제적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 확대는 그다음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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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정책사회부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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