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500명 수거해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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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원 수첩’은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점집에서 경찰이 확보한 약 70쪽짜리 메모장이다. 그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불러준 내용을 받아 적은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필적 감정에서는 ‘감정 불능’ 판정이 나왔다. 누가 썼는지는 수사 중이지만 일부 언론이 입수해 보도한 수첩 속 비상계엄 계획은 충격적이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체포자 명단. 수첩에는 계엄 선포 10일 차까지 체포 대상자를 ‘수거’해 ‘수집소’로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체포 대상은 “여의도 30∼50명 수거” “언론 쪽 100∼200(명)” 등 “500여 명 수집”으로 적혀 있다. 이 중 A급은 문재인, 이재명, 유시민, 권순일, 김명수, 조국, 민노총 등이다. 검찰 조사 결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김 전 장관에게서 넘겨받았다는 ‘체포자 명단 16명’과 비교하면 ‘한동훈’이 빠지고 ‘이준석’이 들어가 있다.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판사, 조국 전 장관을 위해 탄원서를 쓴 축구대표팀 감독 차범근 씨도 ‘수거’ 대상이다.

▷“A급 수거 대상 처리 방안”은 살벌하다. ‘수집소’는 “강원도 화천, 양구, 울릉도, 마라도, 전방 민통선 쪽”이고, “확인 사살 필요” “막사 내 잠자리 폭발물 사용” 등의 메모로 보아 ‘처리’는 ‘살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 사용 시 수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문장과 함께 “외국 중국 용역업체” “북한과의 접촉 방법” “무엇을 내어줄 것이고 접촉 시 보안 대책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수거 대상자들을 제거하려 ‘북풍’ 공작을 검토한 흔적들이다.

▷메모 작성 시기는 지난해 4월 총선 이전으로 짐작된다. 수첩 첫 장에 “총선 후 입법으로 집행하는 건 쉽지 않다. 실행 후 싹을 제거해 근원을 없앤다”는 문장이 있다. “여의도 봉쇄” “역행사에 대비해야 한다” “민주당 쪽” “9사단과 30사단” 등의 문구로 보아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계획도 세웠던 듯하다. “행사 후속 조치 사항”으로 “헌법, 법 개정” “3선 집권 구상 방안” “후계자는?”이 나온다. 메모 작성자 머릿속엔 ‘경고성 계엄’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의 장기 집권용 비상계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수첩 속 메모는 휘갈겨 쓴 필체라 동일인이 썼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게 필적 감정 결과다. 검찰은 메모 내용이 파편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있고, 수첩 주인이 작성 경위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며 그의 공소장에 수첩 내용은 담지 않았다. 하지만 허튼 망상이라고 덮고 넘기기엔 체포 명단 작성과 국회 표결 무력화 등 실제 시도한 대목이 적지 않다. 누구 지시로 작성한 것일까. 유혈 친위 쿠데타 모의의 흔적이 ‘계엄의 설계도’였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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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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