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시작점 '겨울연가'…한국 드라마 중장년 시청서 남녀노소 '트렌드'로
조용필부터 BTS까지 K팝 맹활약…양국 관계 부침에도 굳건한 K컬처 '큰 손'
日 대중문화 개방 20여년, '슬램덩크'·아이묭 등 인기…이젠 양국 합작 활발
이미지 확대
[연합뉴스 자료 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김경윤 기자 = # 지난달 일본 도쿄 인근 대형 행사장 마쿠하리 멧세에서 열린 CJ ENM 주최 K팝 축제 '케이콘'(KCON). 인기 그룹 제로베이스원이 무대에 등장하자 3만여명의 현지 관객이 일제히 일어나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했다.
# 지난 4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첫 내한 공연을 연 J팝 스타 아이묭은 양일간 1만6천석을 순식간에 매진시켰다. 발 디딜 틈 없는 공연장에서 '떼창'을 하는 팬들을 향해 아이묭은 "1년 정도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깜짝' 공개했다.
올해 수교 60주년을 맞은 한국과 일본이 양국 간 문화 교류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일본은 지난 20여년 간 한류의 든든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고, 이제는 양국 스타들이 활발히 오가며 상대 국가에서 활약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미지 확대
[KB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겨울연가'로 일본에 상륙한 한류…'사랑의 불시착'으로 재점화
일본에서의 한류를 이야기할 때 배용준·최지우 주연 드라마 '겨울연가'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겨울연가'는 2003년 4월 NHK 산하 BS2에서 방송되면서 중장년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고, 이듬해 4월 전국방송인 NHK를 통해 일본 시청자를 만났다.
시청률은 최고 20.6%를 기록했고, 배용준을 일컫는 '욘사마', 최지우를 가리키는 '지우히메'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2004년 11월 배용준이 도쿄를 찾았을 때 현지 방송사가 헬기까지 띄우며 '욘사마 이동 생중계'를 특별 편성한 것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혜은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 도쿄 비즈니스센터장은 "일본에서 '겨울연가'는 한류의 원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며 "'겨울연가'는 일본에서 한류라는 문화 흐름을 형성하고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고 말했다.
2010년에는 '미남이시네요'가 후지TV에서 방송되면서 '근짱' 장근석이 새로운 한류스타로 떠올랐다.
이 드라마를 필두로 2010년대에는 '쩐의 전쟁', '마왕', '미안하다, 사랑한다', '미생', '시그널', '굿닥터' 등이 후지TV와 TBS 등 일본 지상파 방송에서 리메이크됐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드라마는 50대 이상의 여성 팬이 주로 봤다면, 2019년 현빈·손예진 주연의 '사랑의 불시착'은 한류 드라마의 시청층을 전 연령대로 넓혔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당시 일본 외무상이 이 드라마를 챙겨봤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같은 일본에서의 한국 드라마 재유행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한국 방송프로그램의 일본 수출액은 2012년 1억3천900만 달러까지 늘었지만, 이후 혐한 등의 영향으로 반토막이 났다가 2023년 1억2천200만 달러로 다시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혜은 센터장은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한류의 의미는 윗세대와 다르다"며 "한국 문화는 이제 일상 속 문화 중 하나여서 K팝이나 K드라마 소비가 낯설고 새로운 행동이 아니라 글로벌 트렌드에 맞춘 세련된 문화소비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이미지 확대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조용필·보아부터 BTS까지…K팝 한류의 든든한 '우군'
'욘사마' 배용준이 불 지핀 일본 내 한류는 이후 K팝 스타들이 배턴을 넘겨받았다.
일찍이 1980년대 '가왕'(歌王) 조용필, 계은숙, 김연자가 일본에 진출해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는 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 등은 지금도 일본에서 이들을 대표하는 인기곡으로 회자한다.
2001년 일본에 데뷔한 보아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K팝 스타들의 일본 러시가 시작됐다.
보아는 당시 일본에서 정규 1∼6집과 베스트 앨범 등 총 7장의 앨범을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에 올려놓고, 이 가운데 오리콘 기준 두 장의 밀리언셀러 음반을 배출해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으로 불렸다.
이후 동방신기, 샤이니, 소녀시대, 카라, 빅뱅 등 이른바 2세대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2012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에 전격 방문하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해 일본 내 한류가 '주춤'하기도 했다.
2017년 'T.T'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걸그룹 트와이스가 다시금 물꼬를 트기 전까지 2012∼2016년 '홍백가합전'에서 K팝 스타들이 모습을 감췄던 것은 이러한 영향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기간에도 일본 내 한류는 충성도 높은 팬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갔다. 이는 2017년 이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태에 따른 한한령(한류 제한령)에서 보여지듯이 정치적 이슈에 취약한 중국과는 대조를 이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동남아시아나 남미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경제과 소비력, 현지 팬덤 특유의 결집력과 충성도를 보여주며 한류의 든든한 우군이자 최대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 데뷔 20주년을 맞은 그룹 동방신기가 여전히 현지에서 투어 콘서트로 수십만 명을 동원하는 것은 이 같은 시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규탁 한국 조지메이슨대 교양학부 교수는 "중국이 한한령 이후 한국 문화 수입을 제한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정치·역사적 이슈와 문화를 나눠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라며 "한일 관계의 부침과 무관하게 한국 문화에 한 번 빠지면 꾸준히 좋아하는 일본인이 늘어났다. 이를 통해 과거 일본인들이 몰랐던 식민 지배의 현실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짚었다.
이미지 확대
[빅히트뮤직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트와이스와 방탄소년단(BTS) 등으로 대표되는 3세대 아이돌 그룹은 이후 일본에서 각종 차트 정상을 꿰차고, '꿈의 공연장'으로 꼽히는 도쿄 돔에서 매진 사례를 기록하는 등 K팝 한류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방탄소년단은 2021∼2022년 일본에서 해외 가수 최초로 모든 현지 스타를 제치고 2년 연속 연간 매출 1위에 오르는 진기록을 썼다.
K팝 스타들은 현재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유럽 등 전 세계에서 활약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K팝 한류의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꼽힌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일본은 2012년 이래 올해(4월 기준)까지 줄곧 우리나라의 음반 수출 대상국 1위 자리를 지켰다.
방탄소년단, 세븐틴, 트와이스, 스트레이 키즈 등의 톱스타들이 한국어와 영어 외에 유일하게 현지어로 음반을 낸 시장이 일본이란 점은 그 무게감을 짐작하게 한다.
국내 기획사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하이브의 앤팀·아오엔과 JYP의 니쥬·넥스지처럼 일본 현지 그룹을 잇달아 데뷔시켰다.
◇ 日 대중문화 전면 개방 20여년…이젠 양국 문화 합작 시대
한국 대중문화가 지난 수십 년간 일본에서 큰 사랑을 받은 것과 달리, 일본 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소비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지난 1998년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가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일본어판 만화책과 만화 잡지 등을 시작으로 문호를 처음 열었다.
우리나라는 이후 ▲ 공인 국제영화제 수상작·전체관람가 영화·2천석 이하 공연(2차 개방·1999년) ▲ 12세 및 15세 관람가 영화·국제 영화제 수상 극장용 애니메이션·모든 규모의 대중가수 공연·PC 게임(3차 개방·2000년) ▲ 사실상의 전면 개방(4차 개방·2004년) 등 점진적으로 그 폭을 확대했다.
문화 개방 초창기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은 일본 콘텐츠는 영화 '러브레터'다.
"오겐키데스카, 와타시와 겐키데스"(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이 영화는 1999년 한국에서 개봉해 당시 누적 관객 수 140만명을 기록했다.
이미지 확대
[영화진흥위원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때는 일본에 의한 대중문화 잠식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지만,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한류의 영향력 등으로 이는 기우로 드러났다.
오히려 한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일방통행식' 대중문화 교류를 의식하는 시각이 생겨났고,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흥행한 일본 콘텐츠가 속속 등장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양국 쌍방향 문화 교류가 꽃을 피웠다.
2023년 일본 농구 만화 '슬램덩크'를 바탕으로 만든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열풍을 일으켰다.
또한 요아소비·아이묭·이마세 등 J팝 스타들의 노래가 국내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들을 비롯해 호시노 겐, 미세스 그린 애플, 세카이노 오와리, 아도, 킹 누 등 무게감 있는 J팝 스타들이 잇따라 국내에서 공연을 열거나 예고했다.
국내 예능 '한일가왕전'에선 '오쿠히타 모정', '아이젠바시' 등 일본 엔카(演歌)가 흘러나오고, 양국 가수들이 국가 대항전 형식으로 노래를 겨루는 장면도 볼 수 있게 됐다.
트와이스의 미나·사나·모모, 르세라핌의 사쿠라·카즈하, 엔하이픈의 니키, 에스파의 지젤, 아이브의 레이 등 일본인이 K팝 그룹의 멤버가 돼 전 세계를 누비는 사례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걸그룹 XG나 코시모시처럼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됐지만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한국 드라마 '완제품'을 수출하거나 리메이크 판권만 판매하는 것을 넘어 TBS 드라마 '아이 러브 유'에 한국 배우 채종협이 주인공을 맡는 등 한국과 일본 배우와 제작진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인적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미지 확대
(서울=연합뉴스) 이재희 기자 = 서울 한 영화관의 슬램덩크 홍보 영상. 2023.1.15
scape@yna.co.kr
현재 제작 중인 일본 넷플릭스 시리즈 '초콜릿 로맨스'의 경우 연출은 일본 감독이 하지만, 각본과 미술·편집·음악은 한국 작가·감독이 담당한다. 주연 역시 한효주와 오구리 슌으로 한일 인기 배우가 맡았다.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 관계자는 "일본 내 방송사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모두 우리가 보유한 지식재산(IP) 현지화에 관심이 크다"며 양국 합작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일본 문화 소비에 있어 장애물은 국가 정책, 국민 정서, 일본 문화에 대한 열등감이었다"며 "문화 개방과 반일 감정 완화로 앞선 두 가지가 해소된 데 이어 우리나라 경제 성장과 한류 확산으로 문화적 열등감도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한일 간 문화 교류는 한층 확대되고, 서로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많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tsl@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6월15일 07시01분 송고